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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Sep 12. 2024

난 어제 무엇을 했지?

변호사와 재판, 정현주 변호사


한참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우레와 같은 빗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무더운 폭염을 모두 씻겨 내릴 듯한 거대한 비였다. 나는 눈을 뜨고 누워 있는 그대로 한동안 멈춰 있었다. 시간은 새벽 2시 반, 애매한 시간대다. 


' 난 어제 무엇을 했지? ' 


어제는 재판 일정으로 오래간만에 사무실에 가지 않았다. 오전에는 영상 재판, 오후에는 같은 법원에서 2개의 재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대가 애매하여 노트북으로 영상 재판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조금 쉬다가 바로 다음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 일어났다. 사무실에서 출발하면 종이기록을 가져가지만, 어제는 어쩔 수 없이 작은 노트북을 들고 길을 나섰다. 


재판을 가는 길에, 상대방이 서면을 제출(그것도 상당한 양의 증거와 함께)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체 왜 변호사들은 그 많은 시간을 놔두고 바로 직전에 서면을 제출하는 것일까? 며칠 전, 재판에서도 담당 재판부는 직전에 서면이 제출되자, 상대방을 나무라며 ' 바로 직전에 서면을 내시면 제가 못 읽고 들어와요. '라고 약간의 호통을 치셨다. 눈썹을 찌푸리기도 했다. 나는 분위기를 보고 ' 저희 의뢰인도 아직 서면을 읽지 못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당일 서면은 읽지 못한다. '라고 얼른 대답했다. 변론은 어쨌든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갈 수 있으면 좋다. 


어제는 두 개의 재판 모두 의뢰인들이 직접 출석하셨다. 


첫 번째 만난 의뢰인은 나를 보자마자 재판이 끝나고 함께 점심을 먹자고 말씀하신다. 이미 2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미소 지으며, ' 정말 감사하지만.. 이 번 재판이 끝나고 또 재판이 있어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테니 그때 같이 드시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 


재판은 예상대로 오늘 변론종결이 되었다. 처음 시작과 달리 참 길었고 어려운 사건이었기에, 기억에 남을 정도로 열심히 쟁점을 찾아 서면을 써서 제출했던 기억이다. 이처럼 열심히 서면을 쓰게 되면 당연히 결과가 좋기를 기대하게 된다. 변호사에게 사건이란 위임장이 들어가면서부터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사건이 되기도 한다. 


한 개의 재판이 끝나고 다음 재판까지 1시간 정도의 텀이 생겼다. 


법원에서 나온 나는 노트북을 가져온 김에 오래간만에 역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1층 카페에 들렀다. 이곳은 지난 번 같은 재판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려다 우연히 알게 된 곳으로, 직접 구운듯한 스콘의 맛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나는 낯선 곳에 가더라도 호기심으로 새로운 카페를 가기보다는 한 번 간 카페를 계속 가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든 한 번 정하면 큰 문제가 없는 한 여간해서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계속 흐렸다 맑았다를 반복한다. 


카페는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분이 혼자 운영하는 곳으로 보인다. 테이블은 4~5개, 가운데에 긴 테이블에 가게에서 직접 구운듯한 구움과자들이 있다. 스콘은 레몬 스콘, 딸기 크럼블, 플레인 세 종류이고, 그 외에 브라우니, 휘낭시에, 마들렌들이 보인다. 작은 쇼케이스에는 조각 케이크들도 있지만 과자들과 달리 케익공장에서 단체 주문한 것으로 보여 눈길이 가지 않는다(나는 예전에 카페 알바를 꽤 오랫동안, 다양하게 한 적이 있다. 많은 카페에서 똑같은 케익공장에서 케익을 대량 주문해온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저번에 먹었던 스콘이 무엇이었는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문득 달달한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딸기 크럼블 스콘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리고 가지고 온 노트북과 코드를 연결한다. 노트북의 전원이 켜지는 동안 진동벨이 울린다.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딸기 크럼블 스콘은 딱 보이는 것과 같은 달달한 맛이다. 그런 음식들이 있다. 보이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어디선가 분명 먹어본 듯한 맛. 나는 오래간만에 달달한 디저트를 먹다 기침을 한다. 기침은 (마치 폐에 무슨 문제라도 있다는 듯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여전히 감기가 잦아들지 않는다. 


노트북의 카카오톡을 연결하자 쉴새 없이 업무 카톡이 울린다. 내가 없어도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는 봄 사무실의 단톡방을 계속 살피며 나는 얼른 상대방이 제출한 서면을 읽어 본다. 사실 오늘처럼 당일 제출된 서면은 송달을 확인하지 않아도 재판부에서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특히나 사건의 첫 기일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다음 기일이 사실상 무조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호사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방의 서면을 읽고 있는데 마침 두 번째 재판의 의뢰인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아마 오늘 온 서면을 방금 봄 사무실 직원이 확인하여 보내드린 것 같고, 이를 읽고 화가 나신 것 같다. 


' 네네. 괜찮습니다. 선생님. 방금 서면이 온 것이라 다음 기일까지 충분히 반박할 수 있어요. ' 


많은 의뢰인들을 만나며 느끼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의뢰인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쉽게 흥분을 한다는 점이다. 또 대부분은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억울한 감정이 크다. 이럴 때 변호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판사와는 관점이 다르니 무조건 의뢰인의 편을 들어줘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의뢰인에게 (가능하면 가능한만큼) 사실에 가까운 형태로 넌지시 다른 관점을 말해주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나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보면서 ' 네 맞아요. ㅡ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라는 말을 꺼낸다. 어떤 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소송의 과정은 내가 무조건 옳고 상대가 틀렸기 때문에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어떤 누구에게 소송이란 '납득의 과정'일 수도 있다. 이별을 향한 납득의 과정,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납득의 과정, 나의 과오를 알게 되는 납득의 과정, 나의 화를 푸는 납득의 과정 등등 시간이 필요하다. 


달달한 딸기 크럼블 스콘을 먹고 슬슬 걸어 다시 법정 앞에 도착한다. 소액 재판은 실제 재판이 시작되기까지 늘 시간을 잔뜩 지체하기 일쑤다. 이럴거면 왜 10분 단위로 재판을 잡았을까 싶을 정도다. 의뢰인과 함께 법정에 들어가 순서를 기다리며 많은 재판을 구경한다. 도대체 언제쯤 우리의 재판이 시작 될까 싶을 무렵에,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첫 기일이었지만 당일 서면을 낸 피고는 나오지 않았다. 


' 오늘 상대방의 답변을 받게 되어 다음 기일까지 반박 서면을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 


나는 말했다. 의뢰인은 내 옆에 앉아 있다가 판사님에게, ' 상대방이 방금 제출한 서면을 읽어보았는데 온통 거짓말이다. '라고 크게 호통을 치셨다. 판사는 이런 일이 무척 익숙한 듯한 눈으로 의뢰인을 보고 바로 변호사인 나를 쳐다보면서 ' 다음 기일까지 잘 반박하시고요... 혹시 조정 의사도 있을까요?'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물론 '조정 의사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두 개의 재판을 끝내니 어느새 오후 5시가 되었다. 두 번째 의뢰인은 함께 법정에 나오며 나에게  '포도 한 상자'를 가져다주시겠다는 말을 하신다. 


' 변호사님, 차를 가져오셨나요? '  


' 아니요,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 


' 아니, 버스요? 에구.. 돈을 아끼시려고.. ' 


음? 돈을 아끼려고 버스를 탄 것은 아니다. 그저 우연히 법원까지 오는 버스가 있었고 지하철보다 더 빠르다고 생각했을 뿐이다(지하철은 생각보다 많이 걸어야 하니까...). 하지만 의뢰인은 나를 딱하게 쳐다보며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거듭 말씀하신다. 하우스로 가서 나에게 줄 포도 한 상자를 싣고 말이다. 


'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오늘은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 지금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 


나는 웃으면서 인사한다. '포도 한 상자'를 선물해 주시고 싶은 의뢰인의 마음은 물론 알고 있다. 그에게 나는 단지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편인 사람인 것이다. 


버스를 타며 오래간만에 시내 구경을 한다. 신호등 불빛에 멈출 때마다 퇴근 시간인지 횡단 보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쏟아진다.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어디선가 먼 물내음이 느껴진다. 분명 비가 올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다. 문득 내가 늘 들고 다니는 일본에서 사 온 작은 벚꽃 우산이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 


밤이 왔다. 오래간만에 저녁 산책을 하고 잠이 들기 전 ' 면도날 '을 몇 장 읽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인 '서머셋 몸'의 작품이니 조금씩 아껴 읽을 가치가 있다. 


산책을 하는 때, 아주 작은 빗방울들이 하늘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비를 맞는 것은 싫어하지만 더위를 모두 삼켜버리는 비라 오히려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천천히 오래도록 걸었다. 


그리고 녹음이 우거진 풀벌레 소리를 가득 들으며 잠이 들었다. 


몸을 완전히 웅크리고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잠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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