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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넋두리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뜨던 날,

by 정현주 변호사

1.


지난 휴일, 몇 권의 책을 샀는데 그중에 2권을 다 읽었다.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에노시마에서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겨져 있을 무렵, 나는 작년부터 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휴식의 날들을 찾아 짧게 한국을 떠나있기로 했다. 긴 연휴가 되면 어김없이 나는 한국을 떠난다.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필요한 일들은 하루나 이틀 정도에 몰아놓고, 봄 사무실의 휴일 동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잠시 사무실에 나왔다가 조용히 이곳을 떠나있기도 한다.


이런 적절한 쉼표는 일을 할 때의 집중력을 올려준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거실에는 오래전에 산 야마하의 nu1x피아노가 늘 놓여있다. 그것을 잊은 듯이 살아오다가,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진 나는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피아노를 앞에 두고 앉아 은은하게 까만색으로 코팅된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나는 여전히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채로, 그 근처에 있을 익숙한 악보를 찾았다. 왼편으로 보이는 창문으로 긴 밤을 누르고 해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서서히 들어오는 것이다. 새벽이 옅게 사라지고 있다.


어떤 곡도 암기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피아노를 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악보가 있어야만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낡은 카키색과 남색의 악보가 든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찾는 악보들은 10년도 더 전에 만든 것이라, 파일의 한 쪽은 탈구가 된 듯 나가 있었다. 그것을 보니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오른다. 오래전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악보를 복사하여 파일에 하나씩 끼워 넣어 열심히 안되는 부분을 연습했던 수많은 날들이 있었다. 우연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듣는 곡이 너무 아름다워서, 또는 꼭 치고 싶은 열망의 곡이 생기면 그것을 목적 삼아 그야말로 열심히 몰입을 했던 것이다. 들을 수 있는 곡과 내가 칠 수 있는 곡과의 간격은 너무도 넓기 때문이다.


그냥 피아노를 치고 싶은 날이 있다. 우스운 것은, 피아노를 치지 않는 시간이 오래될 때마다 피아노로 다가가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어떤 장소를 가지 않게 되면 더더욱 자주 가지 않게 된다. 인연도 마찬가지이다. 인연이란 내가 키우는 식물처럼 바로 옆에서 늘 보살펴야 한다. 서로에게 가지 않게 되다 보면 습성처럼 착실하게 멀어지고 종국에는 더 나아가지 않게 되어버린다.


나는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쳐 왔는데, 한때는 피아노를 보면 무조건 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갈망이 심하였다. 그렇게 쉽게 질리는 내가 변함없이 애정을 보내온 것이 바로 피아노였다.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치게 되면서 대부분의 피아노 애호가들이 그렇듯이 디지털 피아노를 도저히 좋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아파트에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많은 타협을 하면서 산 나의 첫 피아노가 nu1x였다.


nu1x는 하이브리드 피아노로, 피아노에 실제 해머가 들어가 있다. 아날로그 피아노의 타건감을 실질적으로 구현한 나름 섬세한 악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몇 개의 건반이 삐걱거린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오래전 피아노 학원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먼지가 쌓여버린 오래된 피아노처럼. 그리고 보니 꽤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나는 또 이렇게 널 방치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늘 내 주위의 것들을 잘 돌보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키우지 않는다.


2.


여행을 다니면서 온몸이 흩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길게 기다려 온 오래된 휴식을 취하면서도 말이다. 흰 눈이 지나치게 내리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낡고 좁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분명히 더운 곳을 찾아갔었는데, 그곳도 찬 바람이 감돌고 있었다. 현지인의 말에 따르자면 ' 이상 기온 '이라고 했다. 방콕이 지금 7도라니, 말 다 했죠. 그 말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맙소사.


' 독백을 줄이고 이야기를 써 보는 것이 어떨까? '


그의 조언이었다. 스스로 설명을 하지 말고 스토리를 써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이 사람이 어떠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지 느껴지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스토리를 다시 한번 구상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나는 여행지에서 글을 굉장히 많이 쓰는 편이다. 한국에서 떠나 있을 때 나는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그런 감정들을 모조리 잡기는 어렵겠지만, 필요한 만큼을 현출하기 위해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을 잡으려고 한다.


' 그러니까, 어떤 순간들은 완전히 사진처럼 박제되어 있을 때가 있어. '


나는 말했다.


이를테면 20년 전 호주 Tennant Creek을 여행하고 있을 때였지. 어느 날, 해가 지는 하늘에 남색 빛과 이글거리던 태양이 서로 대립되면서 사라졌는데 놀랍게도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었어. 나는 그 광경이 정말 신기해서, 주위에 같이 캠핑을 하고 있던 다른 6명의 사람들에게 ' 저 하늘을 봐 '라고 소리쳤지. 나의 외침에 다들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 정말, 달이 두 개 떠 있네. ' 다들 그렇게 중얼거렸어. 어느 순간 해는 완전히 바닥의 그물처럼 사라져 버렸지.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려고 사진기를 꺼내들고 셔터를 눌렀는데, 잘못해서 초점이 흐려져 버린 거야. 하지만 두 번째 달이 분명 찍혀있기는 하지, 초점이 나가는 바람에 완전한 달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이런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시절의 그리운 Tennant Creek의 밤을 떠올리고 되감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마도 다시 호주를 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곳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은 모두 다 했다. 어떠한 미련의 여지가 없을 만큼.


필요한 것들은 많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늘 비슷한 것들이니까. 안타까운 것은 내가 원하는 것들은 늘 가질 수 없고, 켜켜이 쌓아둔 창고의 마지막 잔등처럼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림자조차 없이, 산산이 부서진 채로. 하지만 나는 늘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라기보다 그냥 현상을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한국을 떠나 있을 때, 나는 불필요한 감정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몸은 가볍고 정신은 좀 더 맑아졌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소복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하얗게 물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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