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시간을 감으며, 빛을 키우고 있었던 걸꺼야.
요즘의 나는 무척 바빠졌다. 베트남에서 오자마자 정신없이 상담이 잡히기도 했지만, 새로운 일들을 많이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늘 쓰고 있던 글과 산책(최근에는 최강 한파로 인해 산책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지만)외에도 아예 새로운 세계에 조금씩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씩 함께 어울리고 있다.
가끔,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계속 읽곤 한다. 글은 마음껏 쓰지 못했다. 아무래도 갈무리의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 내 주위에는 일들을 제외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 새로운 세계, 전혀 알 수 없는 감정들과 모르는 인연들.
그 와중에 그림자로 남겨진 쓸쓸한 그 곳과 하얀 눈이 내리던 정경을 떠올렸다. 두 손을 곱게 포개고 나를 말끄러미 쳐다보던 너의 눈빛을 나는 기억했다. 깊은 밤, 나는 어디론가 차를 몰고 나간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인해 길은 온통 하얗게 물들어 밤인지 알 수 없을만큼 은은하게 빛이 난다. 마치 며칠 전 보았던 손톱달처럼 모든 것이 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너를 만났다.
우리는 긴 테이블을 두고 서로 마주보면서 앉아있다. 너는 물을 끓이고 루이보스차를 만들었다. 티백으로 주황색으로 은은하게 물드는 여린 맛은 혀끝에서 맴돌다가 추운 내 손과 얼어버린 몸을 따듯하게 덮히고 있다.
우리는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너는 나에게 우물을 떠나버린 뒤의 삶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요즘 내가 관심이 있는 사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인도네시아 우붓에서의 기억과 말레이시아 페낭에서의 기억들을. 그리고 그 곳에서 먹었던 음식들에 대해서. 나는 아마도 곧 족자카르타를 가게 될꺼야. 꼭 그 사원의 모습을 보고 싶어. 나는 말했다.
' 아직은 잘 모르겠어.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나는 내 마음이 많이 빠져버렸다는 사실이야. 나는 그때 너에게 말했었지. 나는 이제 무엇인가를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고 현상을 그대로 두겠다고. 그냥 그대로 두겠다고 말이야. 그게 가능해진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 물론 지금까지 살아오던 나란 사람의 형식이 그렇게까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내부는 변해버렸어. '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 거의 혁명적일만큼, '
' 그렇다면, 너는 다시 우물로 돌아가거나 하지 않아? '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우물로 돌아간다니, 모든 것이 변해버렸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무엇보다 우물은 그 곳에서 나온 뒤로 완전히 삭제되었다. 마치 필름 카메라처럼 화면이 전환되듯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넓고도 넓고 광활하기만 한 평지가 나올 뿐이었다. 나는 한참을 그곳에 서성이다가 이내 발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일종의 체념과도 같은 한 숨을 내쉬며.
나는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걸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곳을 향해서. 그 아득한 곳을 볼 때의 내 마음은 아무것도 없었다. 느리고 느린 레퀴엠처럼 모든 시간은 멈춰 있었고, 어디선가 긴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올 뿐이었다. 나는 쓸쓸하고 낡고 색이 바랜 정경들을 지나쳤다. 대부분은 어둠에 깔려 있었고 빛을 잃었다. 이곳에서 아침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는 맑았고 마음은 어느때보다 평온했다. 그 곳에는 깊은 샘이 있었는데, 나는 그 안에서 나의 빛을 꺼내올렸다. 아주 천천히 말이다. 마치 예정된 것처럼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 우물에서, 나는 아마도 시간을 감으며, 빛을 키우고 있었던 걸꺼야. ' 나는 차를 마시면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당시 나는, 우물의 밖을 알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관심이 없다고 표현하는 쪽에 가까웠다. 나는 빛을 꺼낼 일이 없을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을 품고 시간을 계속해서 감으며 우물 안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길게 동면하는 시간,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잠을 깨다가도 불필요한 곳들에 쏟은 감정들이 넝마가 되어 돌아올 때마다 나는 우물을 찾았다. 그리고 내가 입은 크고 작은 상처들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채 그 곳에 붙들려 있었다.
하지만 때가 되었지. 나는 나중에서야 그것을 알았어. 모든 사람에게는 때가 있고 그 때가 오면 많은 것들이 알아서 정리가 된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나는 그 곳을 나오기로 마음 먹게 되었어.
' 그래서 지금은 어때? '
라는 너의 물음에, ' 좋아. 지금 이대로도.' 라고 간결하게 답한 나는 문득 너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올 때,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