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케언즈에서
갠지스 강에서 얻은 나름의 깨달음은 그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한국을 떠날 수 있는 동력을 만들었다. 그때까지 아무런 삶의 목표가 없었던 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학업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나는 늘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렇기에 삶 전반에 대한 지루함을 느꼈다.
그 즈음 나는 꽤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내가 살고 있던 곳은 신대방역 근처에 반지하 방이었는데, 크게 학교를 잘 다니지 않다 보니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 평일에는 주로 음악을 들었고 주말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집에 있으면 등을 대고 누우면 느껴지는 그 서늘한 느낌이 너무 좋아서 피곤하면 종종 등을 대고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집 바로 근처에는 늘 덜커덩대는 2호선 전철이 지나가는 아름다운 육교가 있다. 나는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다리라고 생각했다. 가로수 길 옆으로 심어져 있는 나무들은 늘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연하게 서 있었다. 나는 늘 그곳을 거닐었다. 등록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학교를 잘나가지 않았다. 극소수의 옛날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만나거나 마음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당시에, 마음을 여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이란 받을수록 피어나고, 또 받은 자만이 온전히 그것을 나눌 수 있기에.
그런 나를 구해준 것은 가장 나중에 만난, 나와 닮은 친구였다.
2. 스물네 살, 호주 케언즈
호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조금 멀리 떠나있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워킹홀리데이 비자'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일을 할 수 있다니, 오래 있을 수 있는데 일단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당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는 호주 말고도 일본이나 캐나다도 있었지만, 나는 가급적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오랜 기간 떠나있으며 한국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결국 나는 호주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혼자 가려고 했으나,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지*가 같이 가겠다며 따라나섰다. 우리는 주위의 우려(친한 친구들이 같이 여행을 가면 반드시 적이 된다는 등의)를 뿌리치고 함께 시드니로 향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시드니에서의 기억은 힘들기만 했다. city로 나갈 때마다 무시무시하게 돈이 깨졌고, job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곳은 일자리가 많은 만큼 경쟁이 치열했고 결정적으로 영어를 거의 못했기에 우리에게 선택지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나와 지*는 늘 하버브리지를 서성거리며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먹었다. 일자리는 city에 거의 몰려 있어서 하루도 빠짐없이 city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는데 그 비용이 너무 아깝기도 했다. 우울함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날들을 보내던 우리는 우연히 시드니에서 기차로 48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케언즈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시드니와 다윈 중간 정도에 위치한 곳으로, 시드니와 달리 사시사철이 아열대 기후인 곳이라고 한다.
' 떠나자. '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머물다가는 한 달도 안 되어 있는 돈을 모두 탕진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케언즈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지만(그때는 케언즈가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지긋지긋한 시드니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미련 없이 48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위로 올라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 기차는 골드코스트를 거쳐 느릿느릿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데려갔다. 기차 안에서 나와 지*나는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나는 한국에서 다시금 멀어지는 꿈을 꾸었다. 시드니에서, 일자리를 잡지 못한 나는 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꿈들을 계속해서 꾸고 있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8시간 넘게 비행을 하여 시드니로 떠나왔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내 안의 무엇인가가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색깔이 완전히 변모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반 년이 넘도록 살았던 케언즈의 기억은 이런 것이다. 한낮에도 빈번히 쏟아지는 소나기, 빨랫줄에 걸려진 하얀 빨래들, 바다가 보이는 에스플러네이드 라군의 수영장과 그 앞에 파티를 하는 많은 사람들, 나는 운명처럼 케언즈에 무사히 안착했다. 카페에 취직을 하여 플랫 화이트, 롱 블랙 등의 처음 들어보는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들고 저녁에는 비디오를 빌려 영화를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단기로 어학연수를 했다(물론 어학연수를 하여 영어에 도움을 받은 것은 전혀 없었다). 드넓은 잎을 자랑하고 있는 푸릇한 나무들과 밤이 되면 날아다니는 거대한 새, 가끔 보이는 박쥐 때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거미와 어디에나 벽에 붙어있던 작은 도마뱀들.
그곳, 케언즈는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 그 안온하고 평온하던 공기를 나는 기억한다. 케언즈는 저녁이 돼도 늘 더웠지만 다행히도 건조해서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 곳은 아니었다. 유명한 그레이트배리어리프는 전 세계의 스노클링을 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숨 쉬는 공기마저 다른 곳, 그곳에서 나는 점차 외국인이 되어갔으며 한국에서의 기억은 나에게서 점차 흐트러지고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너는 여전히 한국에서 그리운 편지들을 보내왔다.
' 잘 지내지? 너는 그곳에서 네가 염원하던 자유를 찾았니? 너의 말대로 무엇인가 분명해질 때까지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 떠나있을 때는 가급적 더 멀리 떠나있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시간들을 거쳐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나에게는 너가 지금 그런 시간이라고 생각해. '
나는 꽤 오랫동안 일부로 한국에서 온 편지들을 보지 않았다. 가끔 지*로부터 한국의 소식을, 그리고 편지들을 받곤 했다. 케언즈의 쉐어 하우스에는 넓은 거실이 있었다. 그곳 바닥은 차가운 시멘트였지만 일부로 따뜻해 보이는(다소 더워 보이는) 카페트를 깔아놓았다. 그 위에 놓여있던 아이보리색 소파는 누구나 앉아 바로 앞에 tv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 소파에 앉지 않았다.
나는 종종 그곳에 비스듬히 누워 천천히 돌아가던 천장의 팬을, 그리고 말도 안 되게 예쁘던 남청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늘 부유하던 나는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드디어 존재로, 실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