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가정법원 조정실에서,
오늘은 오래간만에 양재역에 있는 서울가정법원에 다녀왔다. 서울가정법원은 연수원 시절 내가 시보를 했던 곳으로, 부장판사님을 따라 바로 옆 건물에 있는 '디오디아 뷔페' 도 다녀오고 또 엄청나게 많은 이혼 기록들을 처음으로 보기도 했던 곳이다. 그때는 판사님을 거들어주는 시보, 조정위원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직접 당사자를 대리하는 변호사로서 법원에 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가정법원에 가면 그때 그 시절이 늘 떠올라, 재판이 끝나면 항상 근처의 맥도날드에 들르게 된다(나는 서울가정법원에서 대부분 맥도날드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오늘은 이혼조정사건이었다. 나의 의뢰인은 무려 20년이 넘도록 만난 배우자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고 처음으로 가정법원에 와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 있는 휴지를 보여주며(그것은 지퍼백에 소분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필요할까 봐 휴지를 챙겨왔다고 말했다. 우리는 꽤 오래 조정실에 있었다. 족히 한 시간은 지나는 것 같았다. 상대방과는 특히 재산분할과 관련하여 의견이 일치가 되지 않아 조정위원님이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 변호사님, 저 사람 인상이 어때 보이세요? '
그녀는 상대방이 조정실에 앉아 있는 동안 바깥에 의자에 앉아 나에게 상대의 인상을 물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녀는 자신이 상대를 너무 좋아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지인이긴 했지만, 그때는 눈이 맑고 선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여러 가지로 차이가 나는 집안이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에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해서 결혼을 했다. 1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어떻게 안 좋은 일만 있었겠는가? 삶이란 것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애틋해지고 단단해지는 부분도 물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기보다는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이용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를테면 무척 현실적인 부분에서. 남편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대출을 일으키고 자신의 지인에게 말을 하지 않고 돈을 빌리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생활비도 거의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는 현실적인 부분에서만 필요한 사람 그 이상이 아니란 생각에 그녀는 괴로웠다. 자신의 지난 10년 또는 20년의 선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이 끈을 놓는다면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단 생각에 이별을 고려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갈수록 주위의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지인들이 이 인연의 끈을 놓고 너만의 삶을 살라는 조언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 그것이 잘되지 않았다.
' 생각해 보면, 저는 그냥 겁이 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아닐지라도 예전에 좋았던 모습들이 계속 기억이 났거든요. 마음이 복잡했어요. 밉기도 하고 정말 싫기도 하면서도 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저 사람은 어떻게 사나, 이런 쓸데없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
그녀에게는 어쩌면 '이별을 마주할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인연이라는 것은 내가 이어가고 싶다고 하여 이어지지 않고 또 내가 끊으려고 한다고 그 시점에 바로 끊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길과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다. 인연을 정하려고 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정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결혼할 인연은 따로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그 말은 반대로 해석하면 헤어질 인연도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연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그렇게 고통받으며 살고 있는 것일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간이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인연이 있는 것인지도. 하지만 이 인연을 붙잡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주위의 가족, 친구와 같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경우에도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순간 이혼을 하고 새 출발을 하라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 함께 있을 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자존감이 너무 많이 낮아질 때, 불안하거나 좋지 않은 기분이 들 때 이런 신호들이 저는 안 좋은 인연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반대로 좋은 인연을 만나면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안정되고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한 기분까지 드는 거예요. 매우 안정적인 느낌이 드는 거죠. '
어쨌든 그녀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지금은 마음의 정리를 했다. 그리고 마음의 정리를 하더라도 오래전 좋았던 기억들이 가끔 떠오르는 것이 매우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분명 이 일을 겪은 뒤, 좋아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에게 안 좋았던 인연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무척 좋아지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괜찮게 지내다 보면 그 빈자리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를 명확하게 정리만 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