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오래전 드넓던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던 사향 고래였다.
너와 나는 오래전 드넓던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던 사향 고래였다. 시간을 잊을 때쯤, 멀리서 상아로 만든 거대한 뿔피리와 같은 등대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아득하고 아득했다.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사향 고래로 있었던 그 시절. 그 시간들의 추억들을, 그 잔향(殘香)들을.
하지만 나는 너를 잃고,
우물에 앉아 족히 만 년이 넘는 시간과 세월을 기다려 온 것이다.
그곳은 시간이 멈춰있는 세계였으며, 우물 위로는 때때로 흰 눈이 쏟아져 내렸다. 찬찬히 차오르던 우물의 찰랑거리던 물의 감촉을 나는 기억한다. 한때는 날아오르던 새처럼 그곳을 가뿐히 벗어날 수 있음을 물론 알고 있었지만 나는 새가 되는 대신, 작은 조각돌처럼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흔적을, 모든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소멸해가던 밤, 나는 마침내 무(無)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제는 무엇이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무심(無心) 하던 밤.
나는 등대에 오롯이 앉아있는 너에게 찾아가 말을 건넨다.
우리는, 어쩌면, 오래전 연인이었을지도 몰라. 그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유유히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었지. 우리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어. 당장 닥쳐서 해야 할 일도, 의무 같은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도 않아. 나는 그 기억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너를 찾아올지도 몰라.
내 기억이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나는 늘 이곳으로 찾아와 그때 들었던 아득한 등대의 소리를 기억할지도 몰라.
우리는 어쩌면 말이야.
만약 너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된다면
나는 들숨에 살겠어.
다시 사향 고래로 돌아가겠어.
그러니 아직 불이 꺼지기 전, 이번에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