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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feat. 남양주변호사)

법률사무소 봄 정현주 변호사

by 정현주 변호사


늦은 시간까지 의뢰인과 상담을 하다 보면 문득 사건이 아닌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나의 삶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이 이미 쌓아둔 마음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듣고 싶은 것이다. 상담이 슬슬 마무리될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집이 이 근처세요?'라고 물어본다. 그럼 대부분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물론 공기도 조금 맑아진다.


많은 상담 의뢰인들이 이야기를 하다가 눈시울을 붉힌다. 또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염없이 울기도 한다. 나는 많은 경우 상황에 대하여 냉정하게 말을 하는 편이지만, 그녀들이 우는 이유를 나도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너무 냉정하게 말한 나를 조금 후회한다. 하지만 나는 변호사이다. 그녀들이 상담사가 아니라 변호사를 만나러 온 것이 어떤 마음을 먹은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에게는 한때 견디기 어려웠던 휘몰아치는 감정들이 어느 정도 지나간 것이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냉정하더라도 객관적인 현실을 바로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본적으로 냉정한 편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떤 면에서는 변호사와 맞는 성격인 듯도 싶다. 오늘도 상담 의뢰인의 이야기를 한참이나 듣고 있었다. 그녀는 사건이 발생한 지난 한 해의 이야기를 하고, 또 그를 만나기 전의 더 지난 한 해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어느 순간 울기 시작했고 이야기는 더욱 빨라졌다. 그러는 순간 우리를 둘러싼 공기는 점점 무겁게 자리 잡기 시작했


그 무거운 공기에 잠식되기 전, 나는 말한다.


"안돼요. 이제 그만! 너무 우울해요.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점점 더 우울해져요.

괜찮아요. 괜찮아.. 다 과거일 뿐이에요."


우울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더 우울해진다. 그리고 그다음은? 더 우울해질 뿐이다. 멈추지 않으면 그렇게 우울이라는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공기도 없고 소리도 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우물 바닥과도 같이, 깊고 깊은 고독한 곳에 다다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숨 막히는 외로움은 타인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처음에는 다소 해소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끝도 없이 같은 이야기를 타인에게 하면 무엇 하나? 더더욱 공허해질 뿐인데.


결국 나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끝도 없이 침잠되어 가는 그 우울이라는 바다속에서 손을 힘껏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 건져올린다. 한편으로 그녀가 우울 속에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그래도 해결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이다.


저녁 7시가 넘자 굉장히 배가 고팠다. 나는 분식집에서 파는 어묵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갑자기 나에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는 그녀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시켜 어묵을 함께 먹는 상상을 했다.

"혼자 사세요?"

"네... "

"아.. 많이 외롭겠네요. "

상담이 마무리되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상당히 오랫동안 혼자 있는 삶이 익숙한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잘 몰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 또래였다. 혼자 있는 것이 좋을 때도 많다. 아니 대부분은 혼자 있는 것이 좀 더 낫다. 하지만, 너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너무 혼자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옆에 있는 편이 낫다. 물론 나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거나 제대로 공감해 주는 사람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오늘은 돌아오는 길에 눈들이 바람처럼 쏟아져 왔다. 마치 진눈깨비와도 같은 눈이 후드득 쏟아졌다. 지난밤 깊이 잠들지 못한 나에게 오늘은 상당히 피곤한 날이었다. 나는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을 위로하고 변호사로서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나를 찾아온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고 그들의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었을 때 가장 보람을 느끼곤 한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경우가 생긴다.




어쩌면, 최근의 나는 조금 무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면에서. 이런 날은 나 또한 나의 이야기를 할 편하고 모닥불과도 같은 장소가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작은 불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 불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함께하느냐에 따라 밤길을 비추는 등불과 같이 소중해지기도 하고 또 열정적으로 활활 타오르기도 하며 사실상 완전히 죽어버리기도 한다.

삶의 변화는 타인과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혼자 있는 수많은 밤들로 인해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들은 타인과의 경험을 갈무리하거나 또한 다른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한 완충적인 역할을 하는 중간지대의 역할을 한다. 결국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은 사람이 사실상 전부이며, 이를 치유하기 위한 것도 사람을 통한 경험에 가깝다.

오늘처럼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날, 타인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지친 마음 너머로 내가 가진 에너지들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어느 순간 모두 고갈되어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늘 그렇듯이 집에 돌아가 많은 짐들을 내려놓고 내일을 준비한다.

아... 담백한 전골 요리와 하염없이 듣던 슈베르트의 즉흥곡 3번과 그리고 나를 위로해 주는 너의 눈이 너무나도 생각나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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