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긴 여행길에 스쳐가는 여행객이다.
나를 찾아온 그녀가 말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나를 사랑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불운이었다.'라고 말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바람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십수 년간, 고통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쉽사리 이혼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물론 나는 흔들린다. 이미 결혼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인생이 꼬였을까? 나는 이미 나이를 먹었고, 무엇인가 새로운 시작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많이 지쳐 보였고 우리 사이에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물론 나는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말하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생에 결정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도 말했다.
어느 날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척 우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렇게 대담한 일을 벌일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못되었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벌이고 만다. 그리고 그 결과 나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결단을 내리기 전, 어쩌면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된 너와의 만남을 생각한다. 나는 물론 너를 처음 만났던 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이유로 산책길에 나섰다가 너를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습관처럼 매일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강변의 길을 따라 최소한 30분 정도는 밤바람을 쐬고 돌아오던 때였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나는 하루를 가득 메우는 무료한 시간을 견딜 수 없었고, 반복된 하루는 오로지 밤을 기다리게 했다. 좋아하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특별할 것이 없이 흘러가던 오후의 시간, 그날도 나는 집 바로 앞에 세워둔 작은 자전거(인터넷으로 구입한 저렴하고 작은 자전거로, 멀리까지 타고 가기에는 매우 무거웠다)를 타고 늘 그렇듯이 산책길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너를 만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너의 이야기를 그렇게 귀 기울여 듣게 된 것일까? 어쩌면 너는 의도적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일까? 그것은 이미 언젠가는 벌어져야 할 일이 예정대로 일어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사람의 운명은 이미 결정지어져 있는가? 아니면 우연성의 반복으로 인하여 결정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운명이 결정지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과의 인연은 결국, '돌고 돌아 만나기로 예정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결단의 과정에서 그 운명은 이미 숙명처럼 예고되어 있었으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운명이 선택되어 있다면 어떤 자유가 있는가? 그 운명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인가?
만약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내가 내리는 결단들은 수많은 우연을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과정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나의 인생은 가변적이며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그 가변성 속에서 나는 우연히 찾아온 마주침을 나의 의지로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인생의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그 결단에 의한 선택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인생에서 늘 좋은 선택을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운명이 가변적인 만큼, 나는 운명적 사랑이 소멸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필연성(necessity)과 우발성(contingency)은 무엇이 우선하는가?
나는 오랫동안 삶이 정해져 있다는 것(운명)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종교에서는 태어남을 필연적으로 보기도 한다. 우연히 알게 된 사주를 통해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게 될 만큼 많은 것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삶에 어떤 자유가 존재한단 말인가? 나는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한 반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들뢰즈에 따르면 필연성이 나무이고 우연성은 리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무는 이미 존재함, 즉 근거지음(grunden)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리좀(rhizome)은 나무에서 시작된 뿌리줄기로서 자유롭게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따라서 리좀은 이미 결정된 숙명이 아니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유목적인 사유의 개념이다.
'리좀'은 출발하지도, 끝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친자 관계(filiation)를 이루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alliance)를 이루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 - 이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 와 -와-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 중에서-
사주에 관심을 보이는 나로서는 모순적이지만, 나는 들뢰즈의 리좀을 지지한다. 즉 지금까지도 삶의 많은 부분이 결정지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떤 결단은 우발적인 것들로 인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타인과의 만남과 이별은 정해진 숙명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유로운 선택과 받아들임으로써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결단으로 인한 결과를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들뢰즈의 나무 개념처럼 이미 정해진 것이고 어쩔 수 없었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고통은 만연하고 많은 것들이 숙명이라면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주려고 한다. 잘못된 과거로 인한 현재의 결과 또한 숙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을 찾아나갈 수 있다. 물론 인생의 자유로움을 생각한다면 물론 불완전성에 더욱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긴 여행이다. 우리는 모두 긴 여행길에 스쳐가는 여행객에 지나지 않으며,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긴 여행길에 잠깐 머무른 지점(spot)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규정짓는 것은 없다. 삶이 가변적이기에 우리는 모두 자유인이다. 언제든 나를 불운하게 만드는 것들에게서 '안녕'이라고 말하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