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며

나에게 찾아온 최초의 고독

by 정현주 변호사


그리운 친구에게.


나는 어젯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를 탔어. 그리고 지금은 지난밤 있었던 나의 농축된 감정들을 달래줄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로 너에게 글을 쓰고 있어. 하지만 오늘은 너에게 반드시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모스크바는 너와 한 번쯤은 다시 오고 싶을 만큼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어. 특히 아르바트 거리는 흥미로운 것들과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었지. 그날이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기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아르바트 거리를 걸었지. 정말이지 오래도록 걸었어.


그리고 나는 곧 새삼스럽게도 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 시간을 조금 더 일찍 예매하지 못했을까 생각했어. 호텔 체크아웃 시간을 꽉 채우고 나왔지만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고 기차는 밤늦게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야. 그 시간의 간극이 나는 힘들었어. 어차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면 조금 더 일찍 떠나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테니까 말이야.


밤이 되자 아르바트 거리의 가로등 불이 켜지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 초겨울이라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웠고 길 곳곳에서는 거리의 악사들도 있었지. 나는 문득 다리가 아파 거리 곳곳에 있었던 적당한 벤치에 걸터앉았어.


너는 물론 잘 알고 있겠지만 그 당시에 나는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보았어. 초겨울이라 살짝 춥긴 했지만, 너의 상상과 달리 모스크바는 그렇게까지 춥진 않아서 괜찮았어. 아니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는 적당한 정도의 차가움이 필요했는지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길을 걷고 있었어. 그중에서는 정말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한 연인들과 친구들도 있었어. 나는 하염없이 그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행복해 보이는 그들과 달리 내가 이국의 땅에 완전 버림받은것 같은 몰골로 그저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기차 시간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나를 아무도 모르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낯선 땅에서 뜬금없이 앉아 있었던 거야. 거기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어. 그리고 내 주위의 어느 누구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 나는 그때 핸드폰조차 없었어(너도 알다시피 나는 혼자 있고 싶어서 핸드폰 로밍을 하지 않고 여행을 떠났어).


그런데 내가 만약 기차를 타러 가다가 이곳에서 길을 잃으면? 또는 강도를 당해 가지고 있는 여권과 짐을 모두 도둑맞으면? 한국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애초의 한국이 나의 근본적인 고향이 맞는걸까? 이런 불필요한 생각들이 갑자기 떠올랐지. 그리고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어. 오른쪽 고막 근처에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어.


차가운 바람은 내 볼을 사정없이 두드렸고,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벤치에 앉아 몇 십분째(또는 몇 시간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나에게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들에게 나는 낯선 사람임과 동시에 외국인이었으니까. 그것은 무척 자유로운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어떤 상실감마저 함께 느껴졌지.


말하자면 내가 그곳에서 어느 순간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다고 해도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 수 없는거야. 내 눈앞의 사람들은 나와 굉장히 먼 곳에 있었고(그것은 정말로 아득히 먼 지점이었어), 나는 나를 아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지점들이 모두 끊겨있었던 거야. 한국에서는 어쨌든 돌아가야 할 집이 있고 안락한 친구들이 있기에 위험을 느낄 신호가 별로 없었어. 그것을 느낄만한 여유가 다만 별로 없었던 거지. 나는 우주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광활함을 느꼈어. 그리고 나는 내가 몹시 지쳐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 감정이 고독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어.

그렇게 나는, 나를 찾아온 최초의 고독감에 몸을 맡기고 그 아름다운 거리에 숨어 있었어. 그야말로 시계도 보지 않았지.


하지만 한번 시작된 고독감은 반가운 사자(使者)와 같이 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어. 나는 계속 그 곳에 앉아 있으면서, 정말로 내가 사라진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지. 이내 나는 삶에 크게 미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나에게는 꼭 돌아가야 한다거나, 반드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거나 하는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무엇을 반드시 남겨야만 한다거나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


어쩌면 나는 존재하지 않음(無)의 형태로 바로 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기로 결심한 것처럼 어디든 향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며칠을 머물다가 또 기차를 타고 헬싱키로 들어가거나 또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지루하고도 긴 시간을 기다린 끝에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 붉은 화살호 기차를 타게 된 거야. 기차 시간이 다가온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어. 내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정체불명의 고독감에 눅눅해질 때쯤, 나는 잠이 깬 듯이 그다음 행선지에 오르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내가 탄 야간 기차는 한 칸에 2층 침대가 나란히 붙어 있어 4명의 사람이 함께 탈 수 있는 구조였지만 다행히 내가 탄 칸에는 나밖에 없었어. 나는 흔들리는 기차간 2층 침대 위에서 옷을 갈아입고 1층 침대에 내려와 앉았지. 마침 지나가던 승무원이 퍼석퍼석 한 빵과 요거트를 간식거리로 챙겨주었어. 나는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흩어지는 청명한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빵과 요거트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어. 살아있음을 느끼고, 또 이곳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듯이 말이야.


그리운 친구,

너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편지라도 쓸 수 있음에 감사해.

또 내가 느끼는 이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너에게 들려줄 수 있음에 감사해.


아마도 나는 나를 집어삼켰던 그 광할한 고독속에서 열심히 살아남았음을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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