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동안만 살수 있어.

무서운 꿈을 꾸었다.

by 정현주 변호사


따뜻한 라디에이터의 공기가 방안을 가로지른다. 나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깨어났다. 고막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풍과도 같은 소리였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눈은 움푹 패어있고 검은 눈물이 흐르는 죽음의 사자(使者)와 같이 몰골을 한 중 단발의 할머니가 은색 소형차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주차장이었다. 아파트 주차장인지 상가 주차장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단지 주차장이라고 보기에는 무척 어둑하고 습한 느낌이 들었다. 중 단발의 할머니는 어떤 차도 통과할 수 없는 이상한 지점에 차를 비스듬히 세워놓고, 정면을 응시(눈이 움푹 패어 정확하진 않았으니 적어도 시선으로는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고 있었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알 수 없는 비쩍 마른 얼굴에는 이상한 혼(魂)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차를 하필 그 방향으로 돌려야 해서, 할머니가 정면 쪽을 응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동안 가급적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재빠르게 운전을 해서 그곳에서 빠져나가려는 마음을 먹었다. 차는 슬슬 죽음의 사자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죽음의 사자는 내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12일 동안만 살 수 있어. 받아들일 수 있겠나? "


분명 그 할머니 쪽에서 나오는 말이었는데, 음성은 전체적으로 크게 들렸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듯한 음성은 아니었다. 괴이한 일이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은색 소형차에 앉아 있는 눈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가 차 안에 있는 나에게 이렇게 큰 소리로 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분명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제부터 12일 동안만(오늘을 포함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살 수 있고, 이는 무조건적인 통보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아주 형식적으로 '네'라고 답을 해야 하고 그대로 이 분명하지만 이상한 계약이 완료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계적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은색 차를 탄 할머니는 갑자기 질주하듯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차는 광란의 레이스를 벌이더니 회오리처럼 올라가게 되어있는 주차장의 좁은 통로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갔고, 바로 앞에 있는 하얀색 승용차와 크게 충돌하였다. 나는 운전을 하는 중에 충돌된 하얀색 승용차가 힘없이 내 쪽으로 굴러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마침 바로 앞에 통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얀 차는 통로에 크게 부딪히더니 다시 왼쪽으로 회전했다. 이 정도의 큰 충돌이 있었음에도 죽음의 사자가 탄 은색 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이 할머니에게 오늘이 딱 12일째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누군가에게 딱 12일 동안만 살 수 있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 수상한 일이 운명적으로 당신에게 벌어질 일이라는 것도 예감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아무런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 채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죽음을 맞으러 온 것이다. 어쩌면 이미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았고, 내가 본 것은 그 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방금 눈앞에서 펼쳐진 이 감각들이 제3의 감각처럼 이상하게 느꼈다(물론 나는 꿈속에 있었지만 꿈속의 감각은 때때로 무척 현실적이다). 당장 이 주차장에서 나가야만 했다. 나는 천천히 운전을 하여 찌그러진 캔과 같이 구겨진 차를 옆에 두고 바깥으로 나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바깥공기를 쐬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오자 눈부신 흰빛들이 쏟아졌고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바로 앞에 있는 형상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뭔가 인생의 중심 축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2일 동안만 살 수 있다.라는 예언은 분명 현실처럼 어딘가에 각인이 되었고, 그 시간에 따라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뒤편에서 차들이 미친 듯이 '빵 빵' 거리면서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갓 길에 차를 주차하고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눈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눈앞은 온통 하얗게 시야가 흐려졌다. 아아.... 큰일이다. 드디어 죽음이 목전에 왔다. 12일이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 나에겐 단지 12일 만이 허락된 시간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 하필 나인지는 모르겠다. (난 아직 객관적으로 죽기에는 젊은 편이 아닌가?)


왜 남은 시간이 12일인지도.


하지만 12일이어야만 하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까닭이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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