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다 다른 이들이 아픈 몸을 고치려고 한 장소에 머물러 있다. 사람이 몸이 아플 때에는 예민해져서 타인에 대해 열려있는 마음을 갖기가 어렵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인 걸 서로 확인하면 의외로 쉽게 마음을 여는 곳도 병원이라는 장소다.
D병원에서는 누군가가 내 병문안을 와줄 때만 가발을 쓰고, 평상시엔 집처럼 비니를 쓰며 지냈는데 대학병원에 피검사를 하러 가는 날에는 풀세팅의 차림으로 나가곤 했다. 가발도 예쁜 걸로 골라서 쓰고, 화장도 하고, 옷도 예쁜 걸로 입는다. (어느 기간이 되면 피검사를 이틀에 한 번 나가기 때문에 외출이 잦아 입원할 때 캐리어에 옷을 잔뜩 챙겨서 가곤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꾸며주면 자존감도 올라가는 것 같고, 기분이 들떠서 마음이 쉽게 쭈그러지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이 옷을 입을 때 마음도 옷을 입는다'는 명언을 좋아하는데, 정말 딱 그렇다.
그렇게 병원과는 조금 덜 어울릴 것 같은 화사한 의상을 자주 입고 다니던 나는 암환자들이 많이 몰려있는 대기실에서는 조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주머니 환자들이 내가 보호자인지 환자인지 긴가민가 하시는 느낌이 시선에서 마구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어느 날은 병원에서 진행했던 암환자 가발 교육 수업에서 만났던 분이 대기실에 앉아계시길래 먼저 인사했는데 그분이 다가와서 가발 어디서 샀냐며 물어보신 적이 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아주머니 환자분들이 가발 소리에 다들 한꺼번에 몰려오셨다. 내 가발이 자연스럽고 예뻐 보였는지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만져보고 난리가 났다. 어디서 샀는지 메모해드리고 정신없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새로 오신 아주머니 한 분이 지나가며 물어보셨다.
"뭐.. 유명한 사람이에요?"
"아뇨. 가발 교육 때 만났던 분들이라 인사한 거예요."
대답하고 보니 그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평상시에 적막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대기실이 내 가발 하나로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했다. 이렇게 궁금한 거 못 참는 분들이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기다리신 건가 싶었다. 다들 환자라는 마음의 옷을 입고 있을 땐 조금 침울한 모습으로 있다가, 어느 순간 본인으로 돌아오는 때가 있는데 그날이 딱 그 시점이었나 보다. 평상시 암 센터의 진료 대기실의 공기는 상당히 무거운 편이라 대화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운 장소였는데 그 일을 계기로 먼저 마음을 열고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피검사 후 2시간 대기할 때마다 보호자 없이 혼자 오신 분들과는 종종 대화를 나누었다. 몇 기인 지, 항암은 몇 번 받을 예정인지, 지금은 몇 번째 항암인지 정보를 나누며, 서로의 컨디션을 챙기곤 했다. 나보다 앞서 항암치료를 받는 사람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대화 상대의 컨디션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사람마다 나타나는 부작용들이 달라 누군가는 구내염 때문에 밥을 못 먹는 분도 있었고, 또 다른 분은 우울증이 찾아와 입맛도 없고 의욕이 없다고 하셨다.
그런 대화를 할 때면 서로 항암치료의 무서움을 이미 아는 사람들이라 잠시 적막이 흐르기도 했다. 환자들끼리는 '힘내'라는 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그 말이 그다지 힘이 되지 않는다는 걸 다들 너무 잘 알아서인 것 같다. 어색한 격려보단 말없는 공감이 훨씬 힘이 되는 때가 있다.
한 날은 적막을 깨고 구내염으로 고생하시던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도, 다 지나가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다 지나가더라고요."
본인도 지금 너무 힘드신 상황인데 나의 걱정을 감지하신 모양이었는지 그런 말을 하셨다. 그리고 그 한 마디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지금 가야 하는 길에 조금 더 앞서있는 누군가가 내게 해 준 말이라 더 가슴에 와닿았다. 근거 없는 무조건적 낙관보다는 이런 현실적인 조언이 훨씬 힘이 된다. 나도 치료를 끝낼 때 즈음엔 누군가에게 저렇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