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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1. 네곰보의 택시운전사

[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 네곰보

by 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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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 맛있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스리랑카 음식을 다시 먹게 된 R은 블로그에서 본 혹평보다 훨씬 후한 점수를 주었다. 내가 먹어봐도 제법 맛있었다. 빨랫줄처럼 튕겨 오른 스리랑카 에어라인 비행기가 구름 위로 올라 숨을 고를 때쯤, 라이온 맥주와 스리랑카의 자랑 중 하나인 블랙티도 한 잔씩 마셨다. 전통 복장을 연상케 하는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의 우아한 자태는 입국장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다수의 다른 항공사 승무원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서두르거나 매뉴얼대로 읊지 않으면서도 빠르고 정확했다. 편하고 맛있는 비행이었다.


반다라나아이크 공항(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하자마자 달러를 스리랑카 루피로 환전한 다음 유심칩을 개통했다. 그 사이에 주변을 맴도는 택시회사 직원들의 눈길을 애써 모른 척하고 공항 밖으로 나섰다. 공항 내외부에 입주한 여러 택시회사는 정상 요금보다 적어도 두 배 정도 바가지 씌우기로 확실하게 단합한 것 같았다. 불과 한 달 전에 이 나라를 여행했으니,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택시회사의 손길이 뻗지 않는 곳에 서서 픽미(Pick me)로 사설 택시를 부르려는 그때, 감히 남루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행색의 남자가 불쑥 다가왔다. 그는 곧바로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했고 흥정은 순조러웠다. 내가 오케이를 외치자 그는 차를 가지러 번개처럼 사라졌다. 곧 그가 주차장에서 몰고 온 차를 탔을 때, 그건 정상적인 차가 아니었다. 시트는 푹 꺼져서 엉덩이로 차량 설계도를 읽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문도 열리지 않아서 운전하는 남자가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에어컨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여행을 복습처럼 여겼는지 별로 당황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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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곰보 시내가 가까워지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거미줄처럼 뻗은 전깃줄에는 조그마한 알전구가, 전봇대에는 어설픈 트리가 요란하게 깜빡였다. 불교국(스리랑카의 국교는 불교다)에서 여름의 크리스마스라니, 짧은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덜덜 떨며 인천공항까지 간 고행을 보상받을 일만 남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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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 운전하는 남자는 비스킷처럼 부스러질 것 같은 차에서 급하게 내려 힘겹게 차를 밀기 시작했다. 그는 까탈스러운 손님이 따지고 들기 전에 변명하려는 듯 급하게 손가락으로 앞을 가르켰다. 주유소를 바로 앞에 남기고 기름이 떨어지다니. 내려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문을 열리지 않을 것이었고, 그는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힘껏 차를 밀었다. 주유소 직원이 홀쭉 마르고 지친 차에 주유기를 꽂자 운전사는 흘깃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그를 안심시켰다.


“2,000 루피 맞죠? 우린 아무 문제 없어요. 천천히 해요.”


서남아시아를 오래 여행하며 기름을 넉넉하게 채우지 않은 뚝뚝, 택시 운전사들을 참 많이 만났다. 주요소에 줄을 서고 그만큼 늦게 도착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마다 “가득이요”라고 외치는 운전사는 거의 보지 못했다. 나를 약속한 장소에 데려다 줄 만큼, 새 손님을 일단 자리에 앉힐 만큼만 기름을 채웠다. 그리고 십중팔구는 이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줄 돈을 미리 주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걱정이 앞서던 꼬마 여행자 시절에는 운전사가 나를 중간에 떨쳐버리거나 엉뚱한 곳에 내려주진 않을까 겁나서 까칠하게 굴기도 했다. 지도는 아무 소용 없는 아수라장 같은 도로에서 믿을 건 운전사뿐이었으니까.


같은 일이 거듭되면서 내가 깨달은 건 나와 운전사가 합의한 운임에는 얼마 동안 우리는 같은 편이라는 일종의 선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대는 웃기게도 흥정 속에서 싹튼 정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내는 대가가 아니라 여행파트너로서 운전사에게 의지해야 했고, 운전사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안전하게 데려다 줄게, 걱정마. 스마트폰으로 보는 지도에는 우리의 노하우 같은 건 담기지 않았어. 너를 위해 가장 빠르고 재미있는 길로 여행 중이야.’


기름을 채운 운전사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여러 번 숙소 이름을 묻고 힘차게 엑셀을 밟았다. 곧 정신이 쏙 빠지는 교차로에서 숙소를 지나치자 그냥 내렸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을 때 얼굴을 감싸던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불어닥쳤는데, 어느새 새로운 경험이 주는 설렘이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앞뒤로 메고 걸으며 생각했다.


네곰보의 택시운전사, 만약 내가 그의 차를 타지 않았다면 그는 언제까지 공항에 있었을까. 그의 딱한 사정이 흥정을 쉽게 한 건 아닌지, 혹시 내가 그때 깍쟁이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선하게 웃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던 그에게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했던가,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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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나무 아래에는 작고 귀여운 성모상과 아기 예수를 모신 구유가 보였다. 벌써 땀이 맺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이 여행이 복습 같다던 말은 취소,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히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네곰보의 밤거리는 눈발이 날리듯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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