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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3. 네곰보, 라군 드라이브

[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 네곰보

by 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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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뚝을 힘겹게 데려온 저녁. 운전하는 동안 경직된 몸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달고 맛난 잠이 들면 좋으련만 나처럼 힘 빠진 에어컨을 생각하면 스스로 긴장을 풀어 열을 내려야 했다. 밖으로 나가 네곰보 중심 거리(Main st.)를 걸었다. 원단 가게, 옷 가게, 신발 가게가 많았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파는 간이 상점이 붐볐다. 도로에는 자전거와 뚝뚝과 사람이 뒤섞였다. 학교에 가고, 시장을 보고, 물건을 살피고 흥정하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외국인 여행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지루함에서 깨고 나온 흥 많은 아저씨가 거리에서 춤을 췄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벌인 행사인지 날마다 음악을 트는지 잘 모르겠지만 길에서 몸을 흔들 수 있다는 건 여행자에게는 안정적인 혈압 같은 신호다. 위험한 동네는 아니라는 안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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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았지만 터주대감 분위기가 물씬 나는 식당에서 꼬뚜와 볶음밥을 먹었다. 스리랑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니 여행자 입맛에 맞게 레시피를 바꾸지 않은 서남아, 동남아 음식을 먹을 때면 한국인의 ‘맵부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불닭볶음면은 가소롭게 여기던 내 혀가 자만심을 석고대죄한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맛, 정말 맛있다. 그리고 가격도 관광지의 절반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여행자는 현지인의 평범한 일상을 보지 못한다. 갈 곳과 할 일을 정하고 효율적인 동선과 가성비를 따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여행을 위해 잘 꾸며진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 잠깐 머물며 단편적인 모습만 본다. 여행이라는 흥분제는 이것을 입체적인 경험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여행에서 돌아와 시간이 지나면 마치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여행지와 사람, 그들의 삶을 쉽게 단정한다. 나도 다를 게 없는 이방인이지만 발길 가는 대로 많이 걷고, 정보나 후기가 없는 곳에 가는 걸 꺼리지 않으며, 같은 곳을 또 가다 보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게 분명히 있다. 그때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한 달 전에는 관광에 가까운 여행을 했다면 뚝뚝 로드트립은 스리랑카의 속살에 조금 더 다가갔으면 좋겠다.



다음 날 아침, 찌푸린 눈으로 화장실에 가는데 창밖으로 건너편 옥상에서 남자 2명이 씻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웃통을 벗고 치마 같은 싸롱은 입은 채로 접었다 펴며 호스 하나를 주고 받으며 샤워한다. 어제는 싸롱을 사러 가게에 들렀다가 가격이 비싸서 돌아왔다. 긴 여행에는 5만 원짜리 메이커 옷보다는 5천 원짜리 시장 옷이 부담 없이 입기 좋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다른 데서 살 수 있겠지. 서둘러 씻고 짐을 쌌다.


“콜롬보에 갈 때 절대 큰길로 가지 마세요. 트럭과 차가 엄청나게 빨리 달려요. 교통 체증도 심하고요. 이 영상 좀 보세요. 이 사이에 끼면 어떻게 되겠어요?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실력으로는 힘들어요. 꼭 네곰보 라군(Negombo Lagoon)을 따라 작은 길로 가세요.”


어제 실시간 교통 CCTV까지 보여주던 렌트 업체 사장의 당부다. 차가 쌩쌩 달리는 8차선 도로 대신 인적이 드문 비포장 도롯가를 따라 콜롬보로 간다. 지도를 보니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LA갈비 뼈처럼 생긴 네곰보 라군(석호)은 지도에서 유독 눈에 띈다. 뚝뚝을 타고 처음으로 오래 달릴 길은 다 먹은 LA갈비 뼈 옆에 붙은 얇은 힘줄처럼 가늘었다. 오른쪽에는 바다, 왼쪽에는 석호를 두고 좁은 길을 달려보고 싶다. 짐을 싣고 출발했다. 구글 내비게이션이 어색해 길을 잘못 들기도 했지만 무사히 LA갈비 뼈 끝에 안착했다. 한적한 직선 도로에서 일부러 속도를 줄였다가 가속하며 기어 변속 감각을 익혔다. 방지턱도 부드럽게 넘었다. 여유가 생기자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셀 수 없이 많은 고기잡이 배가 백화점 주차장처럼 정박해 있었다. 수십 개의 작은 돌다리가 석호 위로 길을 이었다. 물고기를 길가에 내놓고 팔았다. 주변에는 펠리컨 무리가 입을 크게 벌리며 방정을 떨었다. 펠리컨은 우리나라 해수욕장 비둘기처럼 자연스럽게 사람과 어울렸다. 그 모습이 생경해 R이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30분 넘게 신나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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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가까워졌는지 식당과 호텔이 나타났다. 갈 길은 많이 남았고 배가 고팠다. 유턴해서 방금 지나쳤던 호텔 식당(The Nangurama Beach Garden and Family Restaurant)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은 보이지 않고 식당은 조용했다. 곧 직원이 나와 주문을 받았다. 투숙객이 다 떠난 점심시간에 불쑥 뚝뚝을 타고 나타난 외국인 여행자를 위해 주방은 분주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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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열 걸음만 가면 해변이다. 이런 곳에 호텔과 식당이 들어선다. 음식을 기다리며 해변에 발을 딛자 가로수에 가렸던 콜롬보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로터스 타워와 높은 빌딩, 공업 지대가 보였다. 얼마 전까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콜롬보, 지난 며칠 동안의 네곰보와 사뭇 다른 도시의 이미지가 반가웠다. 어렵고 낯선 일을 해치며 구김이 생겼었나, 갑자기 허리도 마음도 꼿꼿해지는 것 같았다. 곧 식사가 준비됐다. 스리랑카 식당에는 메뉴가 많지 않다. 어느 식당이나 꼬뚜, 볶음밥 그리고 백반 같은 스리랑카 커리가 메인 메뉴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같은 메뉴를 고를 수밖에 없다. 질릴 법도 한데, 오히려 같은 요리에서 조금씩 다른 맛과 조리법을 찾아내는 것도 재미있다. 오늘도 잘 먹었다. 네곰보와 콜롬보의 딱 중간쯤에서 설렘을 새것으로 갈아 끼운 맛있는 식사였다. 로드트립의 묘미도 거들었다. 이제 우리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밥때를 배꼽 시계에 맡기고 아무 식당이나 고를 수 있다. 지나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짐을 다 가지고도 두 팔이 자유롭고 발걸음이 가볍다. 도시 간 이동은 여행 자투리가 아니라 여행 그 자체다. 길에는 너무나 많은 볼거리가 있어서 채널이 많은 텔레비전 같다. 이제 고작 20km 달렸을 뿐인데, 걱정했던 것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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