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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3. 누와라엘리야, 실론의 샴페인, 티팩토리

[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누와라엘리야

by 찬드

고지대는 늘 비가 내린다. 얼마나 오래, 자주, 많이 내리냐의 차이일 뿐이다. 구름처럼 낮게 깔린 짙은 안개와 뚝뚝 안으로 들이치는 빗속을 달렸다. 가시거리가 짧고 길이 미끄러워서 더 집중해야 했다. 라트나푸라에서 립톤싯을 거쳐 누와라엘리야로 가는 길의 누적 고도는 적어도 2,500m는 넘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급경사와 급커브는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두려움을 물리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새 내 시야는 트였다. 30m 앞, 50m 앞 길과 교통 상황을 예측해 엑셀과 브레이크를 적절히 조절했다. 뚝뚝이 내는 엔진소리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오른편에 그레고리 호수가 나타났다. 말과 마차, 관광객도 보였다. 찬 공기가 바람막이를 비집고 훅 스며들었다. 누와라엘리야에 다시 온 걸 실감했다. 호수를 지나면 빅토리아 공원이 나타날 것이다. 작은 영국이라고 불리는 누와라엘리야는 1,868m 고지대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은 도시이다. 그만큼 춥고, 눅눅한 공기가 도시를 머금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다른 고산지대보다 누와라엘리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이 도시만의 매력이 아주 진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여느 여행자와 다름없이 기차 여행을 선택했다. 절벽과 폭포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기찻길을 따라 달릴 때면 창가로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튀었다. 반대쪽 창밖에는 넓은 차밭이 나타났다. 기차는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가 새로운 풍경을 폭죽처럼 터뜨리며 환한 세상으로 달려 나갔다. 가히 끝내주는 경치였으나 나는 말굽에 밟힌 풀처럼 시들었다. 티켓 구하기는 게 하늘에 별 따기만큼 힘든 인기 구간이었기 때문에, 내가 탄 3등 칸은 출근길 지하철처럼 여행자가 빼곡했다. 큰 배낭을 다리 사이에 끼고 버티는 것도 힘든데 에어컨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린 끝에 나누 오야(Nanu Oya)역에 내렸다. 기차역에서 누와라엘리야까지는 10km 정도 택시를 탔다.


이때 만난 택시 기사가 선하고 성실해 보여서 택시 투어를 문의했다. 그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급하면 체하는 법. 적당한 가격도 알아보고 코스를 정하기 위해서 그날 밤에 문자를 주고받았다. 티팩토리와 폭포 여러 곳을 둘러보는 데 하루에 8,000루피로 협의하고 픽업 시간을 정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정확한 시간에 맞춰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보니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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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담로 티팩토리(Damro Labookellie Tea Centre)에 들렀다. 트립어드바이저에 따르면 담로 티팩토리의 전신은 1,841년에 세워진 맥우즈(Mackwoods Tea)로 스리랑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차 농장이다. 하지만 2017년에 스리랑카의 대기업 담로에 편입되었다. 담로의 주력 사업은 가구 판매이다. 담로가 새로운 분야인 차 산업의 전통과 노하우를 지키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지, 예전 같은 품질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보였다. 흥미로운 관점으로 담로 티팩토리를 둘러 보고 싶었지만 마침 휴일이라 아쉽게 돌아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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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갈 곳은 많았다. 누와라엘리야는 스리랑카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품질의 차 생산지다. 그만큼 다양한 티팩토리가 있다. 그중에 블루필드 티팩토리(Bluefield Tea Factory)는 1,841년에 작은 공장에서 시작해 18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며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홍차를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곳이다.

블루필드는 낡았지만 어쩐지 세련된, 레트로 열풍에 딱 어울릴 만한 공장이었다. 세월감을 그대로 뽐내는 건물을 보며 찰리가 초콜릿 공장에 도착했을 때의 심정을 상상했다. 그동안 높고 먼 곳에서 본 차밭이 한 폭의 풍경화였다면 가까이서 본 차밭은 생동감 있는 영상이었다. 공장 주변은 온통 녹색 차밭. 그 사이로 난 고랑에서 찻잎 따는 노동자가 두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톡, 찻잎이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불면 손톱 만한 새싹이 찻잎과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공장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라 구름 속에 섞였다. 고랑 사이로 달려가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단아하고 예쁜 공장 직원도 평화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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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필드에 잘 오셨습니다. 저는 차 생산 과정에 대해서 안내할 블루필드 직원이에요. 이곳에서는 찻잎의 수확부터 건조, 등급 분류, 포장까지 전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어요. 저기 찻잎 따는 사람 보이죠? 한 사람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찻잎을 딸까요? 무려 20kg입니다. 방금 딴 신선한 찻잎은 저기 보이는 공장으로 옮겨져 바로 공정에 들어갑니다.”

2kg이 아니라 20kg라니. 내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어떻게 깃털보다 가벼울 것 같은 찻잎으로 20kg을 채우는 걸까. 하루에 수천 번 손끝에 힘을 주어야 할 노동의 무게를 실감할 수 없었다. 찻잎 노농자가 받는 임금은 하루에 1500~2000루피(6~8천 원) 내외라고 하니, 너무 야박하다. 스리랑카의 가장 이름난 사업의 최전선에는 저소득 노동자의 그늘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찻잎 노동자 중 상당수는 타밀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이다. 영국은 19세기에 인도 남부의 타밀족을 스리랑카로 이주시켜 노동자를 공급했다.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의 삶은 변하지 않고 대물림 중인가. 타밀족 비중이 높은 스리랑카 북부, 동북부 지역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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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소개와 설명을 마친 그녀를 따라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딴 싱싱한 찻잎의 수분을 제거하는 게 먼저에요. 온도와 습도에 따라 맛과 향이 결정되는 중요한 과정이에요. 찻잎을 분쇄하는 롤링도 중요해요. 찻잎의 세포를 파괴해서 잎에 있는 천연 효소가 산소와 접촉하며 풍부한 맛과 향, 색감을 형성하거든요. 발효를 통해 더 깊은 맛을 낸 다음 다시 한 번 건조해요. 완전히 수분을 없애는 거죠. 우리는 아직도 장작불을 떼는 전통 방식을 사용해요. 완성된 차에 등급을 메기고 포장하며 끝이에요. 녹차(green tea), 홍차(black tea), 실버티(silver tea), 화이트티(white tea), 스페설티(special tea) 등 다양한 등급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녀는 전문 용어를 쉬운 말로 표현하고, 간결한 설명으로 이해를 도왔다. 과연 이 도시는 실론의 샴페인(Champagne of Ceylon)으로 불릴만했다. 이 말은 최고급 와인인 샴페인을 차에 비유한 것으로 누와라엘리야에서 생산된 차의 독보적인 품질을 상징한다. 비록 누와라엘리야에서 생산하는 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품질은 최고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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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공장 견학이 이렇게 흥미롭고 재미있을 줄이야. 견학 내내 ‘아~’ 하는 감탄사를 뱉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 견학을 마치고 시음 공간으로 갔다. 시음도 무료였다. 차를 주문하고 함께 먹을 조각 케이크를 골랐다. 하나에 400루피 정도로 비싸지 않았다. 시내에 있는 빵집보다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지금까지 황송한 대접을 받았으니 더 비싸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차 공부 끝에 마신 차와 케이크는 더 친근했다.

시음을 마치고 매장에 들렀다. 환한 미소로 반기는 예쁜 직원들은 부담을 주지 않고 묻는 말에만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너무 감각적인 옷으로 포장한 차가 가지런하게 진열된 모습은 구매를 충동질했다. 마치 명품 매장에 온 것 같았다. 샘플 병을 열어서 향기를 맡자마자 장바구니를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향기롭다니, 아마 누구도 안 살 수 없을 것이다. 겨울에만 몸을 데울 겸 차를 마시는데, 그걸 알면서도 차를 이것저것 담았다. 차 선물을 반기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데도 선물용으로 몇 개 더 넣었다. 10,000루피, 깊게 넣어둔 신용카드를 꺼냈다. 쇼핑을 마치고 매장 밖으로 나오는데 퍼뜩 정신이 들며 기시감이 몰려왔다.


‘이 차를 언제 다 마시지. 몇 해 전 인도와 대만에서 사 온 차도 그대로 남아있는데.’ ‘그래도 괜찮아. 가끔 작은 사치로 기분을 낼 때도 있어야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정도면 나한테 큰돈은 아니잖아.’


매장 직원과 견학을 안내해 준 직원을 찾아 인사하고 공장을 떠나려는데, 아직도 찾잎을 따고 있는 거친 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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