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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나는 작가가 되기 충분한 '멘탈'을 가졌을까?

부제 : 유리멘탈을 지닌 작가 지망생의 넋두리

by 연두씨앗 김세정

방금 소설 한 편을 친구에게 보내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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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날카로운 비평가보다는 맘 따뜻한 독자를 원합니다.

쓰고 싶은 것만 쓰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쓰고 싶은 것조차 못쓰는 것 또한 괴로운 일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말로 표현하는 일도 어렵지만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말은 뱉는 순간 사라지지만, 글은 좀 더 오래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족하더라도 부디 단점만을 찾지는 말아주세요.

비문과 지적은 편집자에게 맡기겠습니다.

당신은 그냥 읽고 수고했다는 말, 잘했다는 칭찬을 해주세요.

아직 펼치지 않은 나의 펜을 부러뜨리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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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친구의 권유로 짧은 동화 한 권을 써본 뒤 한 동안 다른 작업은 하지 않았다.

'뭐라도 꾸준히 좀 써보라'는 친구의 조언대로 올해는 뭐라도 써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짧은 단편 소설을 지원해보고자 오랜만에 글 쓰는 작업을 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이런 시간은 꽤 오랜만에 느끼는 듯했다.

사는 것을 핑계로 쓰는 것을 미뤄두었다.

가끔 가슴이 아플 때만 가끔 끄적일 뿐, 맘 편히 작품을 구상하거나 쓰진 못했다.

몇 시간 동안 몰입해서 다 쓰고 나서 고민이 됐다.

'글은 완성되었는데 누구에게 보여주지?'

내 곁의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실랄한 비평가들이다.

한 때 문학소녀였다는 엄마, 책 좀 읽었다는 언니, 만화책과 웹툰을 즐겨봤다는 남편에게

뭔가를 공유하는 건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 글을 공유하지 않겠노라 당당히 선언했다.

너무 가깝기에 할 수 있는 비판들이 때론 상처가 될 수가 있고,

나 역시 가까운 이들의 비평에 너무 날 선 대응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같이 글을 쓰는 친구나 선배?

창작자로서 상대를 얼마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적어도 나와 비슷한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누구?

작년부터 내게 글을 쓰라고 마구 펌프질 했던 동기 한 명이 생각났다.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다.

저녁에 친구의 피드백이 왔다.


일단 잘했다며...

써낸 거 자체가 훌륭하다는 칭찬부터였다.

그다음 그녀는 어색한 설정과 수정하거나 보충해야 할 사항에 대해 말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 수업에서는 '합평'이라는 것을 한다.

함께 서로의 작품을 보고 고칠 점, 좋은 점을 함께 얘기하는 시간이다.

나의 첫 합평의 경험은 놀라웠다.

일단 나는 상대의 '놀라운 글솜씨'에 감탄을 했고, 이어지는 무수한 학생들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탄했다.


신입생에 비해 합평에 익숙한 선배들은 일단 정확한 '비문'체크부터 한다.

그리고 오디션 심사위원을 방불케 하는 어마 무시한 의견을 피력한다.

2~3년을 당하다 보면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한 번 당해보면 그 상황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작가의 생각까지 꿰뚫어 보는 그들에게 발가벗겨진 느낌으로 그 상황을 버텨야 했다.

그중에는 눈물을 쏟는 친구들도 있고, 담담하게 자신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친구와도 싸우지 않는 평화주의자였다.

합평 시간에 나는 종종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나의 눈물에 미안함을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의 단점 중에 하나는 '눈물'제어를 못한다는 것이다.

눈물은 항상 참는 편이지만 그냥 수도꼭지처럼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도 주변을 난처하게 할 때가 많았다.

특히나 합평 시간에는 '공들여 쓴 내 새끼(작품)가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 눈물은 처음에 내 노력에 대한 폄하에 대한 분노였고,

나중엔 더 노력하지 못한 내 나태함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내게 비평을 하지 않았다.

너무도 '유리멘탈'이었던 나를 배려했던 행동이었다.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것은 '지적과 비평'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격려의 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나의 나약한 유리 멘털을 깨려고 노력했던 한 교수님도 결국 나의 눈물에 두 손을 드셨다.

"이런 글은 이 작가만 쓸 수 있는 글이다. 왜? 이 작가는 일공공사니까... 이런 생각이 가능한 거다."

어찌 보면 작가로서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참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대학 4학년이 되자, 합평 시간은 더 이상 날카로운 칼날 위가 아니었다.

서로서로 지친 이들에게 위로의 시간이 되었다.

'이 부분은 좋았어요. 이 부분은 좀 자세히 보강해되었으면 좋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취업과 작가의 길에서 많은 친구들이 고민했고, 졸업과 동시에 자신들의 길을 찾아 흩어졌다.

나는 순수문학이 아닌 취업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글과는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순수문학을 견디기엔 내 멘탈은 너무 약했고, 생계는 곤궁했다.

치열했던 20대가 끝나고, 중년을 향해 가는 지금 다시 글 앞에 섰다.

다시 쓰는 일 또한 쉽지 않다.

나는 아직도 그저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은 유리멘탈을 지닌 작가 지망생이다.

하지만, 깨질수록 단단해지는 법을 배웠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망가진 멘탈로 살 수는 없다.

나는 잘 깨지는 만큼 스스로 회복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마 나는 끝까지 쓸 것이다. 백발의 노인이 될 때까지 쓸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생애 한 편 정도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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