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일 : 2021.05.02
영랑생가 :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국가 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된 강진의 김영랑 생가.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까지 45년 간 살았던 집이다. 생가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모란과 우물,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영랑 생가 (강진)
"이번엔 좀 멀리 가볼까 해."
"어디로?"
".... 남쪽으로?"
남편의 새로운 통보였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여행일기를 쓰는 이유는 오로지 남편 때문이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여행에 대한 불안함과 걱정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는 여행은 짐 싸는 것부터 일이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커서 아이들의 짐은 많이 없어지고, 굳이 음식이나 여행지를 생각하지 않고 현지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여행에서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문제는 강진까지의 거리였다. 경기도에 사는 내가 전라남도 강진이라는 곳까지 가려면 차로 한참을 가야 했다. 딱히 강진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하필 강진이었을까?'
한 번에 가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 친정엄마의 시골집이 있는 전라도의 '장수'에서 하루를 묵고 강진으로 출발했다. 강진에서 첫 번째 간 곳은 '영랑생가'였다.
영랑예술학교와 영랑생가 (강진군청 뒤에 위치) 강진군청 뒤편에 위치한 영랑생가는 조용하고 아늑했다. 학교 다닐 때 국어시간에 만났던 김영랑 시인이 45년이나 살있던 곳이라고 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수미상관의 안정적인 구조에 찬란한 슬픔은 역설법을 사용했다느니 같은 국어 수업의 내용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김영랑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이곳에 왔으면 느낌이 더 달랐을까?
교과서 시인의 생가를 직접 가보는 건 좋은 경험이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그저 그 집은 '옛날 집'에 불과했다.
그래도 엄마의 마음은 하나라도 남기고 싶어서 '이것은 마루, 이것은 아궁이, 이것은 지게, 이것은....'
아이들이 하나라도 기억하게끔 끊임없이 사물의 이름을 알려주고, 보여주길 반복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보자. 더 크면 그때 다시 오면 되지.'
포기를 하니 조금 더 편해졌다. 아이들과 영랑생가를 쭉 돌아봤다. 내려오는 길에는 비가 많이 왔는데 강진에 오니 너무 맑은 날씨였다. 쌀쌀했던 봄은 이미 지나갔고, 뜨거운 햇살이 강열했다. 그제야 아 내가 남도로 내려왔구나 싶었다.
세계 모란공원 가는 길 (영랑생가 뒤편) 영랑생가 뒷편, 세계모란공원 가는 길인데 무척 신비롭다.
영랑생가 뒤로는 세계 모란공원이 있었다.
햇살이 뜨거워서 걷기 힘들었지만 파란 하늘은 보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꽃들과
파란 하늘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였다.
이 정도면 됐다.
파란 하늘은 마치 파란 배경에 흰 물감을 발라놓은 듯 쨍한 빛을 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눈부심이었을까. 곳곳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맑은 하늘이었다.
강진에서 만나는 5월의 첫 번째 일요일 오후
아이들은 아마 모르겠지만
김영랑 시인과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영랑 시인의 이름은 김윤식이고, 영랑은 '호'이다. 우리에게 둘 다 유명한 이름이지만 어쩐지 영랑이라는 이름이 묘하게 동글동글 귀여운 느낌이라 더 좋다.)
세계 모란공원의 모란꽃
굳이 관광객이 많이 올 시간도 아닌, 일요일 오후의 강진은 평화로웠다.
다리가 아픈 둘째 딸, 컨디션이 좋지 않은 첫째 딸을 위해 나머지 일정은 다 취소했다.
비록 강진의 첫 번째 코스는 영랑생가로 끝났지만 날씨가 좋아서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