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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씨앗 Aug 18. 2021

[일기] 알바와 자존감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경단녀 엄마의 1년 간의 알바 이야기)

<자율적 육아휴직>



육아의 안정기에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아이들의 커갈수록 엄마의 일은 조금 수월해졌다.


 어린 시절 나는 아기들과 놀아주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놀아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아이의 엄마와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엄마 없이 아이와 단 둘이 놀기에는 조금 버겁지만, 아이의 엄마가 있을 때 아이와 놀아주기는 생각보다 수월하다. 그냥 '놀이'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놀이' 뿐 아니라 먹이기, 씻기기, 재우기, 달래기 등 여러 가지 부수적인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대체해주는 아이의 엄마가 있다면 방긋방긋 웃는 아이와 잠시 놀아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직접 아기를 낳고 키워보니 이놈의 아기들은 대체로 밥은 잘 먹지 않고, 간식은 계속 먹으려 하고, 잠은 잘 자지 않고, 깨야할 때는 졸려한다.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면 평소보다 잘 울고 잘 보챘다.

 결혼 후 6개월의 신혼 후 임신과 육아를 겪은 나는 결혼이 곧 육아였다. 육아와 동시에 하던 일도 모두 정리하고 길고 긴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나는 프리랜서이기에 유아휴직이 아닌 퇴직인가?)

  첫 아이를 낳고 키우던 3개월쯤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전에 출간했던 책을 읽어보았고 같이 작업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작업 제의는 무척 반가웠지만, 나는 두려웠다.

 나의 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100일 되었고, 나는 아직 육아의 '육'도 모르고, 아기 키우는 것도 어려운데 책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잠시 고민하고선 정중하게 거절했다.

 "죄송해요. 제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작업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 직원은 아쉬운 듯 다음을 기약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육아 휴직기가 이리 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 5~6년 키우고 나면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같이 일하던 작가 언니가 새로운 프로그램에 같이 들어가자는 제의도 나는 쿨하게(?) 거절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자의적 휴직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돈을 주는 업무를 거절하고 나니 나에게 남는 일은 무보수의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이었다. 무보수긴 했으나 금전적으로 풍족했고, 직장이 아니니 어느 정도 자유도 있었다.

 나의 주된 일은 20시간 '아이 감시'였다. 아이를 모시는 비서처럼 아이가 움직이면 '뭐가 불편한 가?' 살펴봤다. 아이가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고, 아이의 모든 것을 찾아보고 공부했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이고 싶었고, 우리 아이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프면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가 치료법을 찾아 나섰다. 완벽한 엄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꽤 사랑하는 엄마였다. 그렇게 2년 간 첫째 아이에게 충성을 한 후 둘째 아이를 만났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둘이 되면서 행복도 2배, 피곤함과 고민도 2배로 늘었다.

 첫 아이가 27개월이 되는 날 둘째가 태어났다. 아직 다 키우지도 못한 첫째를 아빠 편으로 보내고 새로운 아이를 키워내야 했다.

 육아는 두 번째지만, 아이 두 명은 처음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아이 하나는 정말 별거 아니었구나. 한 명일 때 더 많이 해줄 걸...'  아이가 두 명이 되자, 둘 다 해주기엔 시간도 몸도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두 아이에 이끌려서 '좋은 엄마' 대신 그냥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아닌 나는 누구일까?>


 잠시 글을 다시 써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쓰던 글을 쓰다가 덮어버리고 한 2~3년을 훌쩍 넘겨 버렸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경력도 무의미 해지고, 글을 쓴 지도 오래되자 두려워졌다.

 '나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커가면서 '재취업'의 대한 불안이 엄습해왔다. 지금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위대한 '워킹맘'들이 많지만 나는 어쩐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아이만 보고 있어도 육아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일'까지 한다고? 아마 나는 둘 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엉망이 될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독립할 시기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간단한 알바인데, 해 볼 생각 있어? 시간도 별로 안 들고, 재택근무가 가능한 거야."

 일명 '꿀알바'라는 말에 흔쾌히 승낙했다.


짧은 인사말 문구와 간단한 칼럼식의 글을 쓰고 원고 페이지당 받는 것으로 처음엔 생각보다 괜찮았다.

뭔가 다시 글을 쓴다는 생각으로 나름 고심하고 '시를 쓰듯' 정성껏 문구를 작성하고 문장을 다듬어갔다.

첫 알바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사장은 마음에 들어 했고, 일은 더 늘어났다.



<엄마의 소소한 아르바이트가 알바 부심(?)>


 첫 월급이 들어왔다. 얼마 되지 않지만 내가 그토록 바라던 아이의 학원비(?) 정도 벌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생활비는 모자람이 없지만 아이의 학원비를 생각하면 갑갑했었다.

 주변 언니들이 애들 교육비로 100~200만 원 얘기할 때마다 나는 크게 경악했었다. 그리고는 내가 그 시기가 되자 교육비 명목의 학원비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유치원 때부터 슬슬 시작인 것 같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꾸준한 시간에 글을 쓰고 원고를 넘겼다.

돈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일을 하는 즐거움이 있다는 걸 느낄 때였다.

 "요즘 나의 자존감은 어디서 오는 줄 알아? 아르바이트비에서 오나 봐. 요즘 아르바이트비 받으니깐 아르바이트비만큼 자존감이 조금 올라간 거 같아."

 워킹맘인 언니에게 알바와 자존감에 대한 엉터리 논리를 잔뜩 털어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작년엔 아버님이 다치시고, 시댁에 돈이 들어갈 일이 많았다. 도련님과 남편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부모님을 도와드렸고, 그로 인해 시어머니께서 며느리들에게 미안해하셨다.

  "어머니, 괜찮아요. 오빠도 회사도 열심히 다니고, 부수적으로 재테크로도 벌고, 저도 요즘 아르바이트해서 틈틈이 애들 학원비 벌기 시작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며느리도 아르바이트비 벌고 있어요~'

 사실 그 말이 제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살림하는 며느리와 밖에서 일하는 며느리에 대한 시댁의 생각은 다르다. (물론 우리 시댁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식이 약간 다르다.) 맞벌이를 하다 보면 육아나 살림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이해가 되지만 집에 있으면서 육아나 살림에 소홀하면 질책의 대상이 된다. 특히 음식을 잘하시는 시어머니의 경우, 아이들에게 남편의 먹거리에 특히 신경 쓰셨다. 살림의 소질이 없는 나는 음식도 육아도 살림도 못하는 편이라 매번 '빵점 며느리'가 된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신혼 초를 제외하고는 아이 때문에 맞벌이를 할 수 없는 상황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맞벌이를 하지 않는 것이 마치 집에서 노는 며느리(?)라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정작 시댁에서는 며느리가 소소한 알바를 해서 아르바이트비를 버는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이라도 번다고 큰소리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알바의 수순>


 아르바이트비는 받는 대로 통장에 고스란히 입금되었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았다고, 뭘 사거나 누구에게 뭘 사주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그냥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왔고, 통장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결혼 후 오랫동안 외벌이였고, 워낙 꼼꼼한 남편의 성격 덕에 우리 집 재정담당은 남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물욕이 많은 것도 아니라 아르바이트비는 한 푼도 안 쓴 채 우리 집 자산 어딘가로 편입되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원고료 가격이 좀 깎일 것 같아. 원고료가 깎인 대신 수주를 많이 따서 원고 개수를 늘려면 돈은 이전이랑 비슷하게 받을 수 있을 거야. "


 사장은 기존 회사 직원 2명을 퇴사시키고 나를 비롯한 2명의 알바를 쓰기로 했다고 했다고 했다.

 어쩌면 사장은 이미 초반부터 아르바이트비를 정해놓고 알바를 고용했는지 모른다.

 '원고료를 깎고 일을 많이 줘서 금액을 맞춰준다'라.... 아 신박한 생각이다.

어쩜 이렇게 자기 위주(?)의 생각일까?

 "나 돈 필요한 건 맞고, 돈을 버는 건 좋은데... 일을 더 많이 해서 돈을 더 많이 벌 생각은 없어. 그냥 내가 일한 만큼의 적당한 금액을 받는 거지. 그리고 이 정도 원고료는 크게 메리트가 있는 건 아니고..."

"회사가 사정이 어려워서... 사정이 나아지면 내가 원고료 다시 조금이라도 올리자고 얘기해볼게."

 육아휴직 중이다가 급하게 투입된 친구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안정적인 알바생(?)인 나와 계속 일하기를 원했다. 친구와 얘기를 끝내고 나는 알바를 계속하기로 했다.

 물론 친구의 말처럼 회사의 경제사정이 나아지면 원고료 협상을 다시 해보겠다는 얘기는 믿지 않았다. 원고료를 이렇게 신박하게 깎을 줄 아는 사장님, 정직원 2명을 퇴사시키고 알바 2명을 고용하는 사장님은 회사 사정이 좋아지더라도 원고료를 올려줄 것 같지 않았다.  


 3개월 만에 원고료가 깎였다. 페이지당 몇 천원이 깎였는데 원고료를 다 합쳐보니 몇 십만 원 차이가 났다. 코로나가 창궐을 하니 어디 그 회사만 어려울까. 속상은 했지만 이해는 했다.

회사 직원들도 몇 명 퇴사하는 바람에 친구는 육아휴직 중에 급하게 복직을 했으니 말이다.

 친구도 도와줄 겸, 자존감도 길러줄 겸, 알바를 계속했다. 아이 유치원 맞벌이 서류 신청 때문에 '서류 확인'을 요청하자 회사에서도 나에게 '계약서' 비슷한 것을 작성해달라며 보내왔다.


저작권 양도계약서


 저작권은 회사가 가지고, 원고에 문제가 있을 시에 책임은 저작자가 진다는 내용이었다. 저작권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정도의 원고였지만, 그냥 넘기는 것도 아까운 데 거기에 문제시 '책임'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나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회사에 보내지 않았다. 보편적인 계약서라고 했지만 그 내용은 나에게 불리한 것이었고, 아르바이트생 취급하면서 뭔가 요구는 조금 과도한 느낌이 들었다. 굳이 그런 계약서를 작성하면서까지 원고 작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간단한 수준의 글에서 점점 글의 난이도와 전문성은 높아졌다. 회사에서는 글에 대한 출처 확인도 요구했다. 인터넷으로 찾다 보니 대부분의 출처는 인터넷 상이 었다. 법률부터 의학, 세법까지 내가 아는 분야를 넘어가는 것도 많이 나왔다. 원고를 쓸 때마다 나는 그 분야에 대해 새롭게 공부를 했고, 그렇게 작성한 원고를 매달 넘겼다.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알바 기간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어려웠다. 코로나는 더 심해져서 아이들의 보육시간은 늘어났고, 남편의 업무도 늘어서 아이들의 양육을 같이 하기 어려워졌다. 아이들의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습적인 것, 교우문제, 생활적 문제 등도 새롭게 생겨났다.


 "이제 알바는 그만둬야 둬야겠어."

 나의 말에 엄마는 만류했다. 그 돈이라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아르바이트는 시간과 장소가 자유롭다는 장점은 있지만 노력한 시간에 비해서 금액이 적어. 그리고 이 일이 나의 글쓰기에 큰 도움을 주는 것 같지가 않아."

 엄마는 말렸지만 나는 확고했다. 그나마 쓰던 브런치 글쓰기도 알바와 아이들의 사생활(?)과 겹쳐지면서 더 이상 쓸 여력을 주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퇴사 결정>


  8월 휴가기간에 급하게 전화가 왔다. 원고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친정인 지방 소도시로 내려간 나는 당황했다.

 "정신없이 쓰긴 했지만, 그래도 읽어보긴 했는데... 어디 부분이 문제인지 설명해줘.."

 

 친구의 설명대로 나는 문제가 되는 부분을 수정했다. 친구는 갑자기 사장이 내 원고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고 했다. 1년 동안 단 한 번도 트집을 잡지 않다가 갑자기 말이다.

 "사장이 너한테 연락이 갈 거야. 네가 원고를 쓴 게 맞으니까, 네가 쓴 부분에 대해서 확인만 해줘."


 금리인상에 대한 기사를 정리한 부분이었는데, 사실 나도 쓰면서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공부하고 쓴 거다. 경제분야에 나보다 지식이 빠삭한 남편에게 급하게 원고를 보여줬다.

 "여보, 이 말이 틀린 말이야?"

 "음... 둘 다 틀린 말은 아닌데... 맞는 말이긴 해."


 경제 용어를 설명하려다 보니 의미가 중첩이 되었고, 그것이 처음 본 사람에게 혼란함을 줬던 것이었다. 나는 문제 되는 부분이 본문에 큰 영향을 주지 않으니 통째로 삭제하기로 했다.

 1페이지가 줄어서 한 페이지의 원고 값이 날아갔다. 하지만 뭐 억울하지는 않았다. 급하게 원고를 고치면서 친구에게 말했다.

 "이번 일 때문은 아니고, 나 알바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아.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거고, 2학기엔 더 바빠져서 아이들을 더 봐야 할 것 같아."

  친구는 나의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에 당황했다. 자신도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서 원고 수정에 대한 요구가 꼭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의 안이함에 대해 느끼고 있었기에 이번 원고 수정이 주는 의미는 그보다 컸다. 만류하던 친구에게 나 역시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고, 아이들 교육에 더 매진하겠노라며 얘기했다.


 원고 수정 중에는 방송원고를 쓰던 버릇이 있던 내가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쓴 것도 문제가 되었다. 그간 늘 그렇게 써오던 원고였는데 한 번의 재재가 없었던 부분이었다. 뭔가 작심하고 터는(?) 느낌에 기분이 묘했다. 이상했으면 원고를 받고 바로 수정 요구를 했어야 하는데, 이미 나는 다른 원고 작업 중이었다.

 친구는 중간에서 자신이 한 번 검토를 덜 한 것이라며 미안해했다. 나 역시 어찌 됐든 원고에 이상이 있었다는 점에서 사과했다.


 친구에게 알바 퇴사(?) 의사를 밝히고 남은 원고를 수정해서 넘겨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마 휴가가 아니라 집에 있었더라면 더 여유롭게 수정을 해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만 그날이 휴가날이었고, 친구는 사장한테 한소리 듣고 당황했던 날이었고, 사장 또한 원고의 문제점 발견 후 날카로웠던 것이 문제였다.

 

 <아르바이트의 '득'과 '실'>


 묘하게 힘들지 않은데, 힘들었던 알바 생활을 청산했다. 1년 정도의 시간 동안 그래도 꾸준히 글 쓰는 시간을 가진 것은 '득'이었고, 그만큼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실'이었다.

 

 알바를 시작하고, 사람들에게 '알바'를 시작했다는 말을 할 때 기분이 좋았다. 많이 벌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다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일은 그만두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직장을 다닐 때 나의 이직이 잦은 편이었다.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다. 나는 '신의'를 중요시하는 편이다. 특히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곳'에서는 일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기계처럼 일했고, 가끔 기계취급을 받는 느낌이 싫었다. 또한 일을 하고도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도 쉽게 마음이 떠났다.

 이번 알바는 나에게 얼마간의 자존감을 주었지만,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 한 번 목소리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사장이었지만, 퇴사를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나는 어린 시절 엄마가 버는 돈보다 집에 있는 엄마가 좋았다. 엄마가 직장생활을 해서 우리 가족이 조금 더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보다도 나와 함께해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엄마가 필요했듯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마 지금도 그 생각이 나를 일터로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도 든다. 돈은 벌지 못하지만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전업으로 돌아왔지만, 1년 간의 알바가 어쩌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아서 좋았다.

 브런치에서 알람이 울렸다. 글을 계속 열심히 쓰라고....

 저번 달에 받고, 이번 달에 또 받았다. 브런치에 몇 달 글을 열심히 썼더니, 잘 안 온다고 자주 오라고 챙겨주는 것(?) 같아서 뭔가 고맙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생각하기 나름, 매크로의 친절에도 행복할 수 있다.)


 

 나의 자존감은 사실 급여로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인정받고 싶은 욕구였고, 그게 글이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그저 아이들의 웃음, 일상의 행복함, 남편의 인정(?)으로도 행복하고 자존감을 찾을 수 있다.

  엄마는 말했다. "자존감 찾는 거 자체가 행복에 겨운 거라고... 먹고살기 바쁘면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다고..."  나는 먹고살기 바빠도 자존감 걱정은 했다.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내 자존감을 지켜줄 것인가. 나라도 사랑하고 인정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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