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혈관아, 미안.
나는 잘 아프지 않는다. 그래서 병원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인생 최대의 수술은 제왕절개 2번!
나름 배도 2번이나 째고, 영광의 상처도 가지고 있다.
사실, 제왕절개를 할 때 내가 가장 걱정한 것은 바로 혈관주사였다.
큰 수술이나 검사에 앞서 늘 하게 되는 게 혈관 주사였다.
"제가 혈관이 무척 약해서요. 잘 찾기 힘들어요. 혈관 제일 잘 찾는 분으로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병원에 들어서면 나는 세상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애원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간호사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병원에서 수 천 수 백명의 환자들을 보다 보면 어찌 나 같은 환자가 없지 않겠는가
첫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갔다. 수술을 하기 전, 혈관만 잘 잡는 간호사가 수술 전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첫 수술을 한 번에 혈관을 잡아서 수술대로 들어갔다. 수술도 두려웠지만, 혈관을 한 번에 잡은 게 나에게는 위로였고, 감사한 일이었다.
두 번째 아이를 낳으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비굴하게 또 간호사에게 애원했다.
"제가 혈관이 약해서요. 첫째 수술할 때도 수간호사님이 오셔서 잡아주셨어요. 혈관 안 터지게 좀 부탁드릴게요."
간호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 중에서 제법 연륜이 있어 보이는 간호사 분이 다가와서 팔을 내밀 어보라고 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살짝 불안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잘하는 사람은 맞아 보였지만, 내 혈관은 지지리도 못났다. 그래서 뭔가 불안했다. 첫 번째 바늘이 들어갔다. 실패! 죄송하다는 말과 두 번째 바늘이 들어갔다. 이번엔 잘 잡았나 싶었는데 다시 빼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세 번째 바늘이 들어갔다. 잡았다! 그리고 터져버렸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이미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팠다. 그런데 누굴 탓하기도 그랬다. 내 혈관이 그렇게 생겨먹은 거였으니...
그제야 간호사는 난처한 얼굴로 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수술방 **간호사에게 잠시 내려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5분을 잠시 대기한 후, 그 병원에서 혈관 잘 잡기로 소문난 명간호사님께 혈관주사를 맞았다.
그러니 어딘가 검사를 하게 되면 '피 뽑는 검사'를 가장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 트라우마의 첫 시작은 초등학교 말 또는 중학교 초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때 헌혈이었는지 피검사였는지 학교로 온 적이 있었다.
학생들 모두 강당에 모여서 일렬로 줄을 서서 피를 뽑았다. 여러 명의 간호사 중에 실력이 좋은 분도 계시고 몇 번 실패하시는 분도 있었다.
난생처음 피를 뽑는 나는 너무 두려웠다. 줄이 가장 긴 줄에 섰다. 가장 잘 뽑는다길래 줄이 그렇게 길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내 앞에 줄은 쑥쑥 줄어들었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1차 시도 실패! 2차 시도 실패! 나는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내 옆으로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3차 시도 실패! 옆에 같이 구경하던 아이들 몇몇이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4차 시도 실패! 팔을 바꿔서 양쪽 팔을 다 찔렀다. 5차 시도 성공!
5차 시도에 성공하자 모두 한 번에 '와'라고 소리칠 뻔했다. 다행히 어렵게 잡은 혈관으로 혈액을 채취했다. 그것도 아주 느리게, 아주 느리게 주사기로 힘없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주삿바늘로 얼얼해진 팔을 문지르며 교실로 돌아왔다.
그렇다. 지랄 맞은 혈관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한 명이 나였나 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매번 채혈 시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혈관이 약하다는 말을 하면 대부분 기본적으로 신경을 써준다. 하지만 인증과정이 필요하다. 최소한 3번 이상 실패를 해야 진짜 잘하는 간호사님을 불러준다.
나는 주사를 안 아프게 놔주시는 분, 혈관을 한 번에 잡아주는 분을 보면 절이라도 하고 싶다. 그만큼 나에게 주사는 절대적인 공포였다.
얼마전 병원에서 검사를 하기 위해 혈관에 조영제를 투여할 일이 있었다. 대기실에 떨면서 앉아있는데, '아아아악!!'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한 아주머니가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아파!! 지꺼 아니라고 막 쑤셔대. 안 해! 아야~ 자기들 팔 아니라고 막 하는 게 어딨어."
주사를 찌른 간호사가 당황한 듯 했듯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닐 텐데 역정을 내시는 모습을 보고 옆에 있는 내가 다 무안할 정도였다.
환자는 화를 내며 나가버렸고, 간호사는 보호자에게 '주사'를 맞지 않으면 '검사'를 해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사자인 간호사도 갑자기 그렇게 소리 지르는 환자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무안했을까.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대기실에 앉아서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앉아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집에 있을 때는 나만 아프고, 나만 환자 같았는데... 병원에 와보니 아픈 사람이 참 많네요."
"뭐 그렇죠. 식당에 가면 밥 먹는 사람이 많고, 병원에 오니 환자가 많은 거죠."
두 아주머니의 말이 딱 맞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순간 웃을 뻔했지만 꾹 참았다.
"요즘엔 아픈 사람 중에 젊은 사람도 많네요. 옛날엔 내가 참 젊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워낙 젊은 사람들도 많아서..."
그 말에 의자에 앉은 주변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지금 대기실에서 젊은 사람은 내 건너편에 앉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와 나뿐이었다. 60대 어르신이 보기에 나는 '요즘 젊은 사람'이었다.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젊은 데 아픈 건 서러운 거였다.
이름이 호명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나보다 훨씬 젊은 남자병리사 선생님이 계셨다. 환자중에 가장 젊다는 게 왠지 조금 서글펐다. 나는 이미 반쯤 울상을 짓고 있었다. 혈관주사가 엄청 아프게 맞고 있었는데, 다시 맞기 싫어서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파도 참고 있었다. 빨리 조영제를 넣고 주사 바늘을 몸에서 빼고 싶었다. 그러면서 낯선 조영제가 몸에 들어가면 또 얼마나 아플까 무섭고 겁이 나던 찰나였다. 나보다는 훨씬 어려보이는 남자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좀 짠한 생각이 드셨는 지 부드럽게 나를 위로해주었다.
"살살해드릴게요. 아프진 않을 거예요."
두 눈을 감고 팔을 내고 감았는데, 반응이 없다.
"저기...."
남자 선생님이 우물쭈물하더니 말을 다시 잇는다.
"어쩌죠. 혈관이 막힌 거 같은데요... "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설마 다시 맞아야 해요? 저는 혈관이 약해서 다시 잡기도 힘든..."
이미 눈이 충혈이 됐는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슬픈 것은 내 혈관이 학대당하는 일이었다. 젊은 병리사 샘은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거 언제 맞으셨어요? 제가 볼 때 지금 이거 바늘이 휘었어요. 안될 거 같아요. 죄송하지만..다시 맞으셔야 할 거 같아요...."
일단 병원에 오면 환자는 힘이 없다. 다시 맞으라면 맞는 거고, 하라면 해야 하는 거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병리사 샘과 밖으로 나갔다. 간호사분들께 내가 혈관을 다시 잡아야 된다는 설명을 해주는데, 왠지 고마웠다. 바늘이 휜 게 그 분 잘못은 아닌데도 다시 맞으라고 하며 미안해하셨다.
그리고 아까 어떤 아주머니에게 크게 당하신 간호사님이 나의 혈관을 다시 잡아주기로 하셨다.
'자기 팔 아니라고!! 막 찔러!!'
대기실 가득 울려 퍼졌던 아줌마의 고함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제가 혈관이 약해서요. 살살 좀 해주세...."
"다 됐어요."
다행이었다. 한 번에 성공했다. 하지만 진짜 너무 아팠다. 그 아줌마 말대로 정말 인정사정없이 손등에 찔렀다. '자기 팔 아니라고 너무해.'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아파서 온 것도 서러운 데... 기계적으로 푹푹 찔리는 팔이 너무 아팠다.
다시 검사 전 조영제를 맞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얼른 조영제 맞고 좀 쉬고 싶었다. 아까 내 바늘이 휘었다며 난처해하던 젊은 병리사 샘이 나를 다시 맞아줬다. 이미 주사를 두 번 맞는다는 말에 내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안 아프게 살살해드릴게요..."
그리고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조영제를 넣어주시고 고생했다며 나를 위로해주셨다. 고마웠다. 하지만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밖으로 나왔다.
검사를 다 받고 병원을 나오니까 그제야 그 말이 가슴에 남아서 사무치게 고마워졌다. 주사 바늘을 찌르면 누구나 다 아프다. 아픔을 잘 참는 사람도 있고 못 참는 사람도 있겠지만, 두려움에 대해 인정해주고 따뜻하게 말해준 게 고마웠다.
간호사든, 의사든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늘 고마웠다. 가끔 환자들에게 차갑게 대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모든 의사, 간호사, 병원 관계자들이 친절할 수만은 없다. 나는 그들이 만나는 수만 수백만병의 환자 중에 하나일 테지만, 나는 나의 전부다. 조금 더 친절하고 따뜻하길 기대하는 건 환자로써 욕심일까? 일 자체가 너무 강도가 높고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도 환자들은 바래본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아주 조금만 따듯했으면 하는 바람 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누군지 찾아보고 싶다. 조영제 바늘 휘어졌다고 울고 있는 나에게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살살 안 아프게 해 주겠다고 안심시켜주신 분. 찾을 수 있을까? 안 찾을 수도 있다. 그냥 고마운 마음만이라도 기억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