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이탈리아 여행기 2.
본격적인 이탈리아 맛보기 시작! 두오모와 커피.
# 이탈리아의 둘째 날이 밝았다
시차에 대한 걱정은 기우였다.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곯아 떨어졌고 일찍 눈이 떠졌다. 일어난 김에 바로 준비를 해서 밀라노 중심가를 향해 출발했다. 다들 알고 있듯이 유럽에서 도심을 판단하는 기준은 광장과 성당의 위치다. 성당 중에서도 가장 큰 성당 혹은 지위가 높은 성당(예를 들어 주교좌 성당 같은)이 그 도시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이탈리아처럼 정통 가톨릭 국가일수록 이런 경향성이 두드러진다. 아침 출근으로 분주한 밀라노 시민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밀라노 두오모 쪽으로 향했다.
두오모(Duomo)는 원래 반구형의 둥근 천장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대성당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사람들에게 유명한 이탈리아의 두오모는 밀라노와 피렌체의 두오모이지만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건 그 도시의 가장 큰 성당은 두오모라 불린다.
# 시작이다. 이탈리아.
두오모 지하철역 출구 계단을 올라 광장으로 나오는 순간, 밀라노 두오모의 압도적인 위용이 나를 덮쳐버렸다. 그야말로 덮쳤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질만큼 너무나 강렬한 경험이었다. 엄청난 규모와 한눈에 봐도 경외감이 드는 입면의 여러가지 예술적 장식까지, 이제껏 만난 성당들 중 가장 완전무결한 구조물이란 생각에 한 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그닥 많지 않은 광장의 풍경도 걸작 그 자체였다. 두오모와 다른 건물들로 둘러싸여진 광장의 전체적인 풍경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문명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딘가를 방문해서 경관이나 풍경에 대해 감탄할 때, 그것이 인공이냐 자연이냐에 따라 다른 인상과 감각을 갖게 된다. 천혜의 자연환경에서는 인간의 미약함을, 인공의 위대한 구조물에서는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갖게 되는 법이다. 나는 이런 오래된 성당이나 궁전 혹은 현대적인 스타디움 내지 공업단지의 거대 구조물 등을 보면서 새삼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고 하는데, 그 날 아침 내가 만난 밀라노 두오모와 광장의 경관은 완벽 그 자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각각의 건축물과 구조물들이 서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경관은 위대한 문명이 만들어낸 완전 무결한 계획의 결과 아니겠는가. 어쨌든, 인간은 대단한 존재다.
# 스타벅스, 그리고 200년 전통의 Pasticceria Marchesi
유럽의 다른 유명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밀라노 또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들은 대부분 도보로 이동 가능한 범위 안에 위치해 있다. 얼핏 보면 가까운 거리이지만, 그렇기에 하루 종일 걸어서 움직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녹초가 된다. 하루 이만보 정도는 아주 쉽게 넘기는 것이 여행의 국룰이다. 그 날 우리도 두오모 광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명소들을 주구장창 걸어 교차로 방문하는 코스가 이어졌다.
두오모 광장의 압도적인 경관을 만난 후, 이탈리아와 가장 어울리지 않을 그 이름 스타벅스 매장을 지나게 되었다. 정확한 명칭은 Starbucks Reserve Rostery Milano. 시애틀에서 시작되어 미국 커피를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 스타벅스가 에스프레소의 고장 이탈리아에 처음으로 오픈한 매장이 여기다. 2018년 9월에 이 매장이 오픈될 때 세계적인 이슈가 된 것을 기억하는데, 에스프레소를 고집하는 완고한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와 아메리카노의 스타벅스가 과연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아메리카노라는 음료는 마치 끓여놓은 라면에 뜨거운 물을 더 부어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라는 얘기로 대신할 수 있다. 그만큼 서로의 커피 문화 간에 엄청난 거리가 있다고 보면 된다.
나 또한 에스프레소를 그닥 많이 접해보지 못한 채로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으나, 이내 이들의 에스프레소에 매료되어 버렸다. 혹은 이들이 갖고 있는 에스프레소 중심의 커피 문화에 매료되었다고 할까. 아메리카노가 가져다주는 일종의 청량감도 좋고(특히 아이스아메리카노에서 느낄 수 있는 시원하면서도 쌉싸름한 특유의 목넘김이 좋다.) 에스프레소 한잔에 담긴 진한 커피의 풍미도 좋다. 한국에서 흔한 테이크아웃해서 이동하며 마시는 편의성과 선 자리에서 후루룩 마시고 자리를 떠나는 이탈리아의 심플한 방식도 마음에 든다. 이처럼 제3자의 입장에선 한잔의 커피라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다. 다양성이란 이런 것이다.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이뤄가는 것. 그 속에서 우린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섭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그런 마음이 조금은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스타벅스가 밀라노에서 참패하는 걸 보고 싶은 마음? 전 지구를 뒤덮고 있는, 특히 한국을 뒤덮고 있는 스벅이 이탈리아의 자존심 앞에 무릎꿇는 걸 보고 싶은 마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이런 속마음을 조금은 안고 밀라노의 스타벅스를 방문했으나, 반전 드라마는 없었다. 화려하고 거대한 매장은 활기찼고, 손님은 많았으며, 이젠 밀라노에 자연스레 스며든 것 같이 보였다. 수 많은 방문객들 중에 현지인으로 보이는 손님도 꽤 많았기에 성공적인 안착이란 생각이 들었다. 리저브 로스터리는 직접 원두를 로스팅하는 매장으로 전세계에 6곳 밖에 없는, 스타벅스가 꽤나 힘주어 만들고 있는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데 밀라노의 기지는 성공적이란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스타벅스가 자리잡을 수 있는 데에는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지 밀라노라는 도시의 특성도 한몫한 것 같다. 사업, 무역 등으로 인해 해외와 교류가 많은 이들이 밀라노 사람들이라고 하고, 그렇기에 이탈리아 다른 도시들보다 외국의 문화에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란 특성이 있기에 스타벅스와 에스프레소의 공존이 가능하게 만든 것 아닐까 하는 것이다.(물론, 이탈리아 카페의 특성을 반영해서 크로아상 및 여러가지 빵, 디저트류와 주류, 칵테일도 취급하는 현지화 전략도 유효한 듯.)이른 아침 잠시 들렀던 밀라노 스타벅스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몇가지 중첩되는 생각들을 내 머릿속에 남겨 주었다.
현대적인 커피의 상징인 스타벅스를 만난 이후 우린 200년 된 제과점인 Pasticceria Marchesi로 향했다. 이 곳은 이탈리아가 사랑하는 각종 디저트와 페이스트리로 유명한 제과점이자 카페인데, 여러 포털 사이트와 여행 매체 등에 단골로 소개되는 곳이기도 하다.(검색하다보면 Marchesi 1824로 뜨는 경우가 많은데 1824가 바로 이 제과점이 오픈한 연도이다.)
테이블에 비치된 소개글을 인용하자면, "18세기(1700년대)의 우아한 건물의 1층에 자리잡은 Marchesi는 20세기 초의 오리지널 가구들, 천장의 격자 장식, 오래된 거울들, 장식등, 철제와 황동 세부장식으로 치장한 목재 카페 카운터 등과 함께 진정한 벨 에포크 시대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라고 한다. 요약하면, 우린 오래 됐고 그래서 멋지다! 이런 말이다.
200년 된 가게라고 하면 유명 관광지 이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이 곳은 멋지게 차려입은 밀라노의 Signore, Signora들이 자리잡고 앉아 맛있는 디저트와 에스프레소를 놓고 활기찬 대화를 이어가는 동시대인들과 함께 숨쉬는, 그야말로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근엄하게 힘주어 서있는 굳은 표정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을 향해 팔을 벌리고 환영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공간, 그런 가게가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시킨 건 아침식사를 대신할 페스트리와 에스프레소, 카푸치노였다.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마치 오리지널 이탈리언처럼 설탕을 뿌리고 휘휘 저은 다음 한모금 맛보았을 때 나는 드디어 이탈리아를 제대로 만나는 느낌이었다. 입 안을 자극하는 강한 쓴 맛과 걸쭉함은 원두 본래의 짙은 향과 생각 외로 부드러운 목넘김으로 순화되며,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까지 다양하고 화려한 미각경험을 만들어낸다. 그렇다. 이탈리아는 한모금의 작은 양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내는 에스프레소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