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이탈리아 여행기 3.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재와 걸작 사이.
# 최후의 만찬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Full Name이다. 해석하면 '빈치 출신 피에르의 아들 레오나르도'라는 뜻으로 빈치는 그의 고향 마을의 이름이었다. 2007년 11월 네이처지가 선정한 인류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차지했다고 하니, 그 명성과 업적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화가, 조각가일 뿐 아니라 과학자, 건축가, 그리고 음악가로도 소개된다는 건 그가 영향을 끼친 분야가 얼마나 광범위한 지 실감할 수 있고, 실제로 그는 매우 다양한 것들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다빈치는 생각보다 그가 남긴 미술작품 중 완성작이 많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오리지널로 확인되는 작품이 17개 정도라고 한다. 이는 그가 회화나 미술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연구와 작업을 행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히스토리와 함께 그가 밀라노에 남긴 걸작인 '최후의 만찬'을 만나러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으로 향했다.
최후의 만찬은 예약을 해야만 직접 만날 수가 있는데 유명세만큼이나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하다. 우린 Hong이 떠나기 몇 주 전부터 예약 사이트를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다 운 좋게 예약에 성공하여 최후의 만찬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수도원 식당의 벽화로 만들어진 것인데 예수가 체포되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배신자가 있음을 말하여 제자들이 놀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예약시간을 5분 정도 남겨 놓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여러 부류의 방문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이탈리아의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청소년 그룹도 있었는데, 이후 우리의 여정에서 거의 매번 만나게 되는 여행객들이기도 했다. 방문하는 장소마다 이런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차올랐다. 어린 시절 당시엔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 있겠지만 아직 뇌가 말랑말랑한 시기에 인류의 위대한 유산들을 나들이하듯 만났던 경험은 훗날 그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리고, 비슷한 나이대에 성적과 공부에 매몰되어 학교, 학원만을 맴도는 한국 청소년들을 생각하니 더더욱 이들이 부러워 보였다.
입장 시간이 되어 들어간 홀에선 낮은 조도의 조명과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 다빈치가 남겨놓은 거대한 벽화를 마주한 순간 고요한 흥분이 밀려왔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해 낸 만큼 유명한 작품의 실체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음과 동시에 벽화의 표면이 보여주는 오랜 세월의 흔적들이 작품이 가진 명성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작품을 설명할 때 덜 마른 석회벽에 수채 물감으로 채색하여 벽에 잘 고착되는 프레스코 기법이 아닌 안료를 정착시키기 위해 달걀노른자를 활용하는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 당시 벽화를 그릴 때는 프레스코 기법이 일반적이었으나 굳이 회벽에 템페라 기법을 도입한 건 다빈치가 가진 호기심 내지 실험성에 따른 선택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벽체로부터 안료의 박리가 심해진 탓에 많이 훼손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도 선명도가 많이 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15분이라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작품에 집중했었다.
복음서에서 최후의 만찬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천주교, 개신교 신자라면 그 내용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미 사전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만난 이 작품에 표현되어 있는 각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는 마치 잘 포착된 연극의 스틸컷같이 느껴졌다. 어찌 보면 각각 명확한 캐릭터와 배경을 가진 예수와 12제자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 어디 신약뿐이겠나, 구약까지 통틀어 성서를 생각하면 예술가들에게 작품 창작의 소재로 이보다 더 훌륭한 이야기들이 있었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최후의 만찬 또한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캐릭터와 스토리를 등장인물 각자의 표정과 행동에 대해 세밀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묘사로 표현한 최후의 만찬이 가지는 가치는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를 고려하면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사진이 없는 당시에 성경 구절 내지 복음서의 일화를 바탕으로 미술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오로지 텍스트를 기반으로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펼쳐내는 작업이다.(물론, 상상을 화폭에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조사와 연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서로 다른 감각의 세계를 교차하는 작업으로 텍스트와 이미지 모두에 대한 이해와 상상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이미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미지를 화폭에 담는 풍경화나 초상화 등의 작업보다 최후의 만찬이나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같은 작품의 위대함이 더 체감되는 것 아닌가 한다.
거대한 벽화 앞엔 작품에 대한 설명과 함께 위치별로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더해져 있고, 이를 바탕으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인물들이 '너희 중 나를 배신하는 자가 나올 것이다.'라는 예수의 폭탄 발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 수가 있다. 특히, 복음서에 묘사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성질이 급해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던 베드로의 표정과 의심 많은 캐릭터로 알려진 토마의 표정과 몸짓, 예수를 배신하는 유다 앞에서 엎질러진 소금 그릇 등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복음서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최후의 만찬이 1498년에 완성되었으니 600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온 셈이다. 그토록 긴 시간을 생각하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할지라도 남아 있는 것 자체가 용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허락된 15분을 소진하고 출구로 나오니 이어진 복도에 벽화가 그려진 공간의 예전 사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세계 2차 대전 당시 이 작품이 그려진 성당 공간과 벽화가 그려진 벽체를 보호하기 위해 쌓아놓았던 모래주머니 더미들이었다. 사진의 설명에 따르면 폭격에 의한 붕괴를 막아보고자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체를 모래주머니를 쌓아 보호했다고 한다. 본 작품으로부터 받은 감명만큼이나 이러한 이들의 노력도 나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2차 대전 시기에도 최후의 만찬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었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자신들의 문화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이들의 노력 덕분에 나를 비롯한 수많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위대한 작품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탈리아인들의 노력의 흔적들은 이후 우리가 방문하는 많은 곳에서 만날 수 있었고, 이들의 노력과 보존의 결과에 대해 나는 존경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작품 감상을 마치고 수도원의 후원과 성당 내부를 둘러본 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최후의 만찬만 기대하고 찾아간 곳이었는데 왠 걸, 후원은 너무나 단아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성당 내부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화려했다. 어쩌면,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한 곳만으로도 몇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 다 빈치가 참여하여 지어진 거대 요새, Castello Sforzesco.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를 떠나 우린 또 다른 밀라노의 명소 스포르체스코 성으로 향했다. 이 성은 14세기에 건축이 시작되어 15세기 밀라노를 지배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 의해 개축되어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요새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성의 개축작업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15세기 후반 다 빈치가 밀라노에 머무르던 시기 이곳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정문에 위치한 필라레티 탑의 높이가 109m에 달한다고 하니 성곽의 높이와 광장의 규모가 주는 압도감이 엄청났다. 이 성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 또한 매우 유명하나 우린 패스. 성과 광장을 둘러본 후 다시 두오모 쪽으로 향했다.
# 모든 것이 걸작, 밀라노 두오모
이른 아침 잠시 마주쳤던 두오모로 다시 향했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도착한 두오모 광장은 아침의 한산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광장 앞 레스토랑에서 로마냐 피자와 리소토로 점심 식사를 해결하고, 두오모를 직접 만나러 갔다.
두오모의 외관으로 이미 압도당했던 나는 두오모의 내부와 지붕을 만난 이후 그 아름다움에 탄식을 연신 내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