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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hine Apr 10. 2022

어떤 삶을 살게 할 것인가

노산일기

부모님은 결혼한지 10년이 넘어서야 나를 어렵게 가지셨던 것 같다. 이 얘기를 부모님과 한 적은 없지만 중학생 때 부모님께서 은혼식을 하셨으니 외동이 귀했던 그 시대의 분위기를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나는 몸이 많이 약했고 부모님은 금이야 옥이야 행여 부서질까 소중히 나를 키우셨다. 내가 어렸을 땐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도 있었고 바깥 세상이 아마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위험한 곳이었던지 내가 혼자 밖을 나갈 일은 절대 없었다.


엄마의 조기교육(?)으로 나는 세 살때 한글을 뗐다. 그 덕분에 집안 방구석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나는 일찍이부터 엄청난 양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꽤나 책이 많았는데 집에 있는 책을 몇 번이고 다 읽어서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지자 부모님이 읽으시던 소위 어른들이 읽는 책까지 읽어댔다. 그 덕에 국어 과목 하나는 항상 최상위권이었고, 언어영역을 따로 공부한 적이 없었으니 아이가 책을 친구로 삼는 것만큼 좋은 교육도 없는 것 같다. 고 3때도 하라는 수능공부는 안하고 하루에 책을 최소 2~3권은 읽어댔으니 그 쪽으로 길을 가서 직업을 찾았다면 조금 편하게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타고난 재능은 소중하지 않은 법이다. 대학교 신입 시절엔 잡지사에 영화 리뷰 투고를 하기도 했고, 대학생 광고 동아리에 시험을 보러 갔다가 1차로 바로 합격했던 기억도 있다. 당시 SKT TTL 토마토 광고가 센세이셔널하던 시절이었는데 이 광고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설명하라는 것이 질문 중의 하나였고, 야채와 과일 간 정체성이 모호한 토마토의 특성, 청소년과 성인 사이를 암시하는 토마토가 터지는 핏빛 장면 등에 대해 서술했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결론적으로 중앙대였던가 국민대였던가 여튼 당시의 지하철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라 너무 멀어 귀찮기도 했고, 친구들과 술독에 빠져 있던 시절이라 여차저차 핑계같지도 않은 이유들로 첫 모임부터 펑크를 내고 결국 입단을 포기 했었는데, 알고보니 그 동아리가 전국구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고 해당 동아리 출신들이 지금의 광고계를 주름잡고 있다고 하니 지나간 버스 향해 손 흔들기. 그때나 지금이나 조직에 대한 미련은 참 없다. 이 또한 혼자 큰 단점이려니.


공대생은 4년 내내 모든 서술 내용을 차트화 하고 요약하고 표로 만드는 것, 그리고 세상을 숫자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체득한다. 술과 친구가 되면서 책과 완전히 멀어지기도 했고. 그렇게 나는 점차 글쓰는 능력을 잃어가더니 이제는 정말 글이 잘 안써진다. 내가 쓰고 읽어도 허술하기 짝이 없고 누가 볼까 부끄럽다. 죽기 전에 책 한 권 쓰는 것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데, 이젠 정말 쉽지 않아 보인다.


전치태반 비슷한 사유로 제왕절개를 하기로 했다. 의사가 수술이 가능한 날짜 세 가지를 주며 날짜를 골라서 예약을 하라고 한다. 사주, 뭐 그런 것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니 결정 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남들 다 한다는 택일이라는 것을 해 보기로 한다. 잘 아는데가 없어 지인들에게 물어물어 세 군데 정도에서 날짜를 받았는데 웃기게도 다 다른 날짜를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 날짜를 왜 택했는지 물어봤을때 어, 누가 이 날짜 좋다던데? 라고 대답하기가 참 논리가 빈약해서 유튜브에서 사주보는 법을 직접 보고 공부하기도 했다. 물론 하루만에 사주를 볼 줄 알게되면 세상천지 사주 못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각 사람들마다 설명해주는 날짜별 사주의 특성보다도 나의 귀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 중 누군가의 질문이었다.


"어떤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은데요?"


자식을 낳는다면서 그런 생각도 안 해 본 나는


"어.. 그냥 몸과 마음이 편안한 삶을 살면 좋겠어요..."


라고 대답했지만  이후로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질문이 맴돌며 교묘한 욕심들과 뒤엉켜 마치 버킷 리스트를 무작위로 써 내려가듯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 삶에서 부족한 것을 아이의 삶에서 채우려고 하지 말자는 나름의 소신 앞에 갑자기 던져지는 또 다른 질문은,


'그럼 나는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나는 삶이란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유명해지거나, 돈을 엄청나게 벌거나, 권력을 잡거나, 이름을 남기거나 등등의 많은 욕구들이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항목들이다. 그냥 선물같은 이 인생을 사는 동안 가능한한 많이 둘러보고 많이 느끼고 내가 눈감는날 '아, 여행 잘하고 간다.' 라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행복하게 떠나고 싶다. 내 가족들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 여유가 된다면 인생이 조금 더 충만해질 수 있는 것들을 배우게 하고 알려주고 싶다.


많이 사랑 받고 그만큼 남들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우주의 모든 현상과 생명체들에서 호기심을 채워 나가고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면

그림, 음악, 소설 등, 대 작가들이 남긴 유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키웠으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즐기기 위해 악기나 춤 같은 것 하나씩은 취미로 배웠으면


이제 새롭게 쓰기 시작하는 가족과의 버킷 리스트.

어느덧 우리 아이는 백일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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