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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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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hine Apr 10. 2022

딸입니다.

노산일기

임신을 하면 아이의 성별이 그렇게 궁금하다고들 하는데 난 딸이든 아들이든 개의치 않았고 솔직히 성별 자체에 관심이 좀 없었다. 내가 그렇게 꿈꿨던, 어느새 스스로 내 인생에는 없을 수도 있겠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임신이라는 것이 뭔가 일사천리로 이뤄지면서 실감이 나지도 않고 내내 얼떨떨하기만 해서 회사집 회사집을 반복하며 여느때처럼 일에만 계속 몰두했던 것 같다.


초음파로 성별 확인이 가능한 시기가 되자 의사선생님은 “보이지 않네요.” 정도의 힌트를 주셨다. 불과 수년전만 해도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산부인과에서 성별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딸이라더라 라고 했더니 병원에서 성별도 알려주냐며 놀랐던 사람들이 실제로 몇몇이 있었다.


성별을 듣고 가장 먼저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엔 항상 엄마와 더 가까웠는데 오늘만큼은 아빠에게 먼저 얘기해 주고 싶었다.


“아빠 딸이게 아들이게?”


“글쎄, 아들일 것 같은데?”


“아들을 원해?”


“아들 낳으면 한숨 돌리지.”


“딸이래.”


“그래, 뭐 딸도 괜찮지. 첫째 딸은 살림밑천이다.”


약간은 서운해하는 아빠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빠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나는 아주 어렸을 적 아빠와의 사소한 순간순간들을 꽤나 많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렵게 아이를 가져서 그런지 아빠는 나를 너무 예뻐라 했었고 엄마에겐 비밀이었지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오뎅공장으로 다시 일어섰던 아빠는 나를 종종 아빠의 공장에 데려가곤 했다. 아빠가 운전하는 자전거 앞에 달린 바구니에 얹혀져서 햇빛을 맞으며 공장 공터를 돌던 것, 오뎅 만들고 남는 음식찌꺼기를 처리하기 위해 키우던 돼지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나를 번쩍들어 돼지 우리 위로 비행기를 태워주던 순간.

무엇보다도 제일 좋았던 건 아빠가 늦게 들어오시는 날 내가 거실에서 자는 척하면 나를 번쩍 들어서 방으로 옮겨주시던 기억이었다.

나는 아빠가 내가 딸이라서 더 좋아하셨을 거라고 여태 착각을 하고 살았다. 아마 아빠는 시댁에 대한 숙제 같은 마음이셨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에도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물론 좋은 뜻으로 이야기 해 준 것이고 특히 요즘은 딸이 트렌드라며 축하해주는 사람도 참 많았다. 그런데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좀 어렵지만 나는 그 얘기가 참 불편하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내 딸을 그저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키우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된다.


아빠는 올해로 84세이신데, 나는 아직도 길을 걸을 때 아빠와 손을 잡고 걷는다.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나마 가진 몇 안되는 성격상의 장점들은 아빠의 무한한 애정 덕분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은 그저 사랑만으로 충분한 관계이다.


무한대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그 넘치는 사랑을 또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일. 내 평생 내 자식에게 해야 할 그 어떤 댓가 없는 인생의 숙제이다.



아들 딸, 그게 뭣이 중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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