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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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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hine May 20. 2022

천성은 못 바꾼다.

노산일기

결혼 후 이런 저런 불가피한 이유로 남편과 집을 합치는 것이 좀 늦어지면서 임신을 한 상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남편도 뭘 못 버리는 성격이라 집이 이미 가득 차 있었는데 내 짐까지 합치니 이건 뭐 답이 안나오더라.


맥시멀 라이프 + 맥시멀 라이프 = 돼지우리


나는 맥시멀리스트인 반면 물건 짱박기의 달인이라 가구 이리 저리 배치하고 물건 엎고 새로 정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닌데 임신 상태로는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애 낳고나 할 수 있으려나? 했는데 역시나 애 낳고는 더 불가능.

그렇게 세상 짐을 다 머리 위로 지고 살다가 슬슬 배밀이를 시도하는 아기를 보고 이거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정리 업체를 쓰기로 결심했다.


5명의 인원으로 아침 9시에 시작한 정리는 저녁 7시에나 끝이 났다. 돈도 이사비용만큼이나 들었지만 일은 이사보다 더 힘들어서 두 번은 못하겠더라.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업체분들의 질문이나 안내에도 아몰랑 다 버려요로 일관. 내가 짐 정리를 한 것도 아닌데 애기를 하루 종일 안고 있어서인지 애나 나나 소금에 절여진 오이마냥 기진맥진 쓰러졌다.


문제는 그 다음날부터.

물건들이 당췌 어디있는지를 모르겠더라. 내 동선에 맞게 움직임과 시간을 최소화 하기 위해 벌려놓은 물건들이 버려졌거나 알 수 없는 어느 곳으로 정리 혹은 처박혀졌는데 하나 찾아 헤메는데 하세월이다.  가구를 옮길 수라도 있게 공간을 만들어 주신 것은 감사하나 약간 비포애프터 사진찍는 것이 더 진심이신 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물건 정리가 살짝 두서가 없었던 것도 사실.


스크루지 남편은 업체에 지불한 돈도 아까워하더니 어디서 공짜로 얻은 이빠진 술잔 버린 것도 그렇게나 아쉬워 한다.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나도 마찬가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물건들에 왜 이렇게 미련이 많은건지. 배낭여행 때 8키로 짐만으로도 세 달을 지내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보면 이 짐들의 80%는 더 버려도 될 듯 한데.


짐 찾는다고 패킹한 것 다시 벌려놓고, 자주 찾는다고 밖으로 꺼내놓고, 그렇게 이틀만이 하나 둘씩 슬슬 예전 모습을 찾아가는데… 아 진짜 천성은 못 바꾼다 싶다. 살아 생전의 이 많은 짐들, 죽을때도 무덤에 다 가져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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