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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느린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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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hine Jun 17. 2022

한 발자국 정도는 가고 있다.

느린 정원

어린이집을 보내면 내 세상이 열릴 줄 착각했다.

부랴부랴 짐 챙겨서 어린이집에 보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집안 정리하고 이유식 만들고 밥먹고 온라인 수업하나 듣고 샤워하고 뭐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4시다.

집을 뒤집은게 엊그제 같은데 다시 두더지굴이 되고 있다.


그제 저녁쯤 그림책 출판 전 최종 편집파일이 도착했다.

허접해보였던 그림도 전문가의 표지 편집과정을 거치니 출판용 책같이 그럴듯해 보인다. 뭔가 진짜 작가가  듯한 황홀한 기분에 고작  개의 pdf파일(표지+내지)이었을 뿐인  미래의 전자책을 밤새도록 만지작 거렸다. 이미 책을 많이   분들은  내는  그거 돈들이면 누구나  하는 별거 아닌 일이라고 하겠지만   것이 아닌 것이 갑자기  손에 잡힌  같아 얼떨떨했다. 평생 처음으로 짧은 시간이나마 원없이 그림 그릴 기회를 얻었는데 이걸로 출판도 하는구나,   덕분에 살아생전 이런 경험도  보는구나 싶어 마음이 많이 벅찼다.


다음 책은 좀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다음날 화실 등록을 했다. 비용과 시간 문제로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들을 뿐이지만 그래도 전문가의 지도 아래 온전히 그림을 그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나에게는 처음 누려보는 호사 같은 일이라 의욕에 불탔다.


수채화 물감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수채화를 한 달간 연습해 보기로 했다.

수업을 시작하고 얼마지 않아 기억이 떠올랐다. 혼자 그림을 그렸을 때의 그 기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잘하려고 용을 쓰면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진이 된다. 눈도 빨려들어가는 것 같고 두통도 생긴다. 붓터치 하나하나 소심하게 접근하니 시간도 엄청 걸린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그림을 완성하면 그 현실 결과물은 또 내 이상과 괴리가 너무 심해서 마음도 많이 상한다.

전문가의 지도 아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기분에 누가 쳐다보는 부담감이 더해지는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온전히 집중이 잘 안 된다는 거였다. 어린이집에 두고 온 아이는 괜찮을까, 아직 집 정리를 하나도 못했는데, 저녁 이유식은 만들어 놨던가? 아이를 케어하라고 육아휴직을 받은 건데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죄책감까지 몸은 화실에 있는데 마음은 사방팔방 미쳐 날뛰고 있었다. 커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ADHD가 이런거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아이가 잘 때 초 스피드로 그림을 그렸던 시간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그래도 눈 앞에 아이가 있으니까.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이제는 후회 남기고 싶지 않은데 다시금 깨닫는다. 환경과 조건이 안됐던게 아니라 내 의지와 성격의 문제였음을.

그래서 그냥 한 번 가보기로 한다. 인생의 여러 가지들이 어떻게 하나의 줄기로 이어질지는 가봐야 아는 일일테니까.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겼던 글이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아가는 길이 무거워집니다. 조금은 마음을 비우고, 힘을 빼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한 발자국 정도는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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