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정원
어린이집을 보내면 내 세상이 열릴 줄 착각했다.
부랴부랴 짐 챙겨서 어린이집에 보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집안 정리하고 이유식 만들고 밥먹고 온라인 수업하나 듣고 샤워하고 뭐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4시다.
집을 뒤집은게 엊그제 같은데 다시 두더지굴이 되고 있다.
그제 저녁쯤 그림책 출판 전 최종 편집파일이 도착했다.
허접해보였던 그림도 전문가의 표지 편집과정을 거치니 출판용 책같이 그럴듯해 보인다. 뭔가 진짜 작가가 된 듯한 황홀한 기분에 고작 두 개의 pdf파일(표지+내지)이었을 뿐인 내 미래의 전자책을 밤새도록 만지작 거렸다. 이미 책을 많이 내 본 분들은 책 내는 것 그거 돈들이면 누구나 다 하는 별거 아닌 일이라고 하겠지만 난 내 것이 아닌 것이 갑자기 내 손에 잡힌 것 같아 얼떨떨했다. 평생 처음으로 짧은 시간이나마 원없이 그림 그릴 기회를 얻었는데 이걸로 출판도 하는구나, 내 딸 덕분에 살아생전 이런 경험도 해 보는구나 싶어 마음이 많이 벅찼다.
다음 책은 좀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다음날 화실 등록을 했다. 비용과 시간 문제로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들을 뿐이지만 그래도 전문가의 지도 아래 온전히 그림을 그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나에게는 처음 누려보는 호사 같은 일이라 의욕에 불탔다.
수채화 물감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수채화를 한 달간 연습해 보기로 했다.
수업을 시작하고 얼마지 않아 기억이 떠올랐다. 혼자 그림을 그렸을 때의 그 기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잘하려고 용을 쓰면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진이 된다. 눈도 빨려들어가는 것 같고 두통도 생긴다. 붓터치 하나하나 소심하게 접근하니 시간도 엄청 걸린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그림을 완성하면 그 현실 결과물은 또 내 이상과 괴리가 너무 심해서 마음도 많이 상한다.
전문가의 지도 아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 기분에 누가 쳐다보는 부담감이 더해지는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온전히 집중이 잘 안 된다는 거였다. 어린이집에 두고 온 아이는 괜찮을까, 아직 집 정리를 하나도 못했는데, 저녁 이유식은 만들어 놨던가? 아이를 케어하라고 육아휴직을 받은 건데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죄책감까지 몸은 화실에 있는데 마음은 사방팔방 미쳐 날뛰고 있었다. 커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ADHD가 이런거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아이가 잘 때 초 스피드로 그림을 그렸던 시간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그래도 눈 앞에 아이가 있으니까.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이제는 후회 남기고 싶지 않은데 다시금 깨닫는다. 환경과 조건이 안됐던게 아니라 내 의지와 성격의 문제였음을.
그래서 그냥 한 번 가보기로 한다. 인생의 여러 가지들이 어떻게 하나의 줄기로 이어질지는 가봐야 아는 일일테니까.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남겼던 글이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아가는 길이 무거워집니다. 조금은 마음을 비우고, 힘을 빼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한 발자국 정도는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