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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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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hine Jun 22. 2022

가족

노산일기

마침 친정이 있는 곳으로 남편이 3주 가량 출장을 가게 되어 겸사겸사 나도 서울에서의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후발대로 따라 왔다.

덕분에 손녀가 눈에 삼삼하던 엄마아빠는 신이 나셨고, 순둥이 내 딸은 어찌나 방긋방긋 웃어대는지 내가 못다한 효도를 딸이 다 하고 있는 중이다.


아빠의 눈은 아무래도 회복이 어려울 것 같다. 점점 더 안보인다고 하신다. 눈이 잘 안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아빠는 급격하게 행동이나 판단력이 둔해지셨다. 그렇게 총기가 넘치시던 분이 말도 두서가 없고 더듬거리고 목소리도 커지셨다. 생각과 몸의 속도가 편차가 나니 마음만 급하고 답답하신 모양이다. 혹시나 남들한테 피해를 끼칠까봐 정당한 요구도 못하시니 그 속 갑갑함을 어디 풀데도 없어 매일 한숨만 쉬신다.


그 와중에 새로 맞춘 틀니도 뭐가 안 맞는지 몇 번을 병원에 다시 가도 교정이 되지 않아 잇몸이 부르트신다. 세상 고기 좋아하시는 분이 음식을 제대로 못 드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기존 치과에서의 틀니가 도저히 안될것 같으면 돈 버린 셈 치고 다른 병원에서 새로 맞추시라 했더니 그건 또 돈이 아까우신지 이래저래 망설이신다.


남편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했더니 틀니 비용 자기가 부담할테니 제일 좋은 걸로 하란다. 작년 엄마 다리 수술비도 그 큰돈 본인이 덥석 내더니 자기 말마따나 쥐꼬리 월급에 집안 병원비는 자기가 다 낼 작정이다.


남편은 정말 자수성가 한 사람이다. 지하 단칸방에서 지금까지 본인 힘으로 올라온 사람이다. 돈 한 푼 아껴쓰는 습관이 아직도 몸에 배여있어서 자기 물건 하나 제대로 사는 일이 없을 뿐더러 옷 한 벌 양말 한 켤레도 가장 저렴한 것을 사서 떨어질 때까지 입는다. 남편이 와이프 부모님 챙기는 거 누군가에게는 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모은 돈인지 빤히 아는 나로서는 지폐 한 장도 마음에 무겁게 내려 앉는다.


점심 약속이 있으신 아빠를 배웅할 겸 버스 정류장에 따라 나갔는데 아빠는 버스를 타는 중에도 보도 블럭 턱을 보지 못하시고 걸려 넘어질 뻔 하셨다. 돌아 오시는 길엔 괜찮으실지, 날씨가 더운데 길을 잘 못 들어 헤메시진 않을지, 순간순간이 걱정이 되고 신경이 쓰인다.


결혼하기 전 가장 큰 걱정은 부모님이었다. 건강하실 때야 떨어져 있어도 괜찮지만 어느 한 분이라도 편찮으시면 서울 생활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방에 가서 직장은 어디에 잡나, 요양원 비용은 얼마나 하려나 나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등등…


지금도 경제적인 문제들에서 자유로워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 혼자였으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 현실의 무게를 남편과 딸이 그 짐을 덜어주다 못해 다 들어주고 있다.


오늘 남편이 보내준 낙곱새 전골에 아빠는 저녁 밥을 두 그릇이나 드셨다.


너무 행복하다는 걸 입밖에 내놓으면 악마가 시기하지 않을까 가끔 걱정이 되는데, 그래도 이곳에 오프라인의 나를 아는 사람은 없을테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내 인생을 통틀어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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