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일기
유후인클럽의 조식은 꽤 맛이 있었다. 후쿠오카에 오면 꼭 먹어야 된다는 음식 중의 하나인 고등어 구이를 포함, 양식과 일본 가정식이 합쳐진 것 같은 정갈한 부페 음식들을 천천히 맛나게 즐겼다. 남편은 쌀밥이 왜 이렇게 맛있냐며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원래 후쿠오카는 눈 보기 힘든 곳이라고 들었는데 어제부터 스믈스믈 내리기 시작한 눈은 유후인을 떠나는 날 아침이 되자 폭설로 바뀌어 영화처럼 유후인역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서울이야 신속하기로는 전 세계에서 일등간다고 자부하는 곳이지만 조금은 시골스러운 이곳은 어떨지 대형 버스로 가는 고속도로는 괜찮을지 신경이 쓰였다.
어디에 숨어들 있었는지 버스 정류장에는 아침 일찍 유후인을 떠나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3일권 산큐패스를 샀는데 둘쨋날에 다자이후를 가지 못했던 이유로 오늘은 가야하는데 유후인에서 하카타역까지 2시간 반, 다자이후까지 편도 40분, 왕복 1시간 반의 버스 탑승이 아기에게 부담이 될 듯 하여 가기를 조금 망설였다.
그래도 내가 다자이후는 꼭 가보고 싶어했던 곳이었다는 걸 아는 남편은 강행을 해 보자고 했다. 역시나 아기는 긴 버스 여행이 답답하고 짜증이 났는지 기분을 큰소리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눈 길 위의 버스는 특별히 문제 없이 안전하게 하카타역에 도착했으나 하카타역 시내는 무슨 이유에선지 정체가 심했다. 새로운 숙소에 체크인 하자마자 짐을 던져놓고 다자이후를 가기 위해 다시 역으로 나왔다.
아침을 든든히 먹었지만 아무래도 아기의 끼니가 좀 걱정이 되어 역근처에 먹을만 한 것이 있나 둘러보며 빵이나 하나 사자 싶어 빵집을 들렀다가 그 옆 우동가게에 줄이 긴 것을 보고 우동이나 한 그릇 할까 하는 남편의 제의에 동의하고 얼른 줄을 섰다.
역사 간이 음식점 같은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이었지만 아기를 본 식당 이모는 구석의 그나마 널찍한 곳에 테이블을 마련해 주었고 자판기로 주문한 우동은 3분도 되지 않아 뚝딱 나왔다.
우동을 한 젓가락 먹자 남편은 이런 부드럽고 쫄깃한 면발은 처음이라며 운좋게 너무 괜찮은 식당을 오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일본 우동을 몇 번 경험해 본 나는 사실은 흔히 일본에서 맛 볼 수 있는 우동의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남편이 맛있게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원래 40분이 걸리는 버스시간인데 눈 때문인지 교통 체증이 너무 심해서 한 시간 넘게 걸려 다자이후에 도착했다. 다자이후에서 하카타역으로 오는 막차 버스 시간이 2시간 반 정도 남은 듯한 늦은 시간이라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마음이 급했다.
관광객이 많아 집중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고즈넉히 감상을 해야 할 예쁜 곳을 무슨 미션 수행하듯이 빠른 걸음으로 둘러보며 책에서 본 의미가 있는 장소 앞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우리 딸이지만 공부의 신을 모시는 곳이라니 좋은 기운 많이 받으라고 한겨울 차가운 소도 맨손으로 열심히 만졌다.
오는 버스는 더 심각했다. 주말 시내의 교통체증까지 겹쳐져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입석으로 버스를 탔는데 한 시간도 더 넘게 걸려서 허리가 뿌러지는 줄 알았다.
이미 해는 뉘엇뉘엇해서 피곤하고 만사 귀찮고 저녁이나 제대로 된 좀 맛있는 걸 먹자고 가격대가 좀 있는 식당들을 찾아 다녔는데, 어쩜 모든 곳이 이렇게 만석인지? 자리가 뻔히 보이는 곳도 거부를 하기에 설마 노베이비존 이런 걸로 거부 당한 건 아닌가 괜히 화도 나기 시작했다.
처음의 옵션은 아니었는데 그나마 자리를 내어준 유일한 곳이기에 들어간 이자까야스러운 술집은 들어가자마자 너무 잘 왔다 싶게 다다미 독방을 내어 주었고 술안주류이긴 했지만 나름 코스 요리가 있었다.
서빙을 해 주는 직원이 무언가를 엄청 열심히 설명해 주었는데 이곳도 영어는 아예 통하지 않았던 관계로 한참을 생존일어 및 파파고를 이용하여 대화를 한 결과 두 시간 동안 맥주가 무제한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심지어 기린 병맥주가!!
기쁜 마음 한켠으로 걱정이 밀려왔다. 남편은 무제한 술이라면 약간 정신줄을 놓고 먹는 스타일이라 이미 부릉부릉 이글이글 장전 중인 그의 눈을 보니 이걸 어쩌나 싶었다. 그러던 중 안주가 코스별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닭 날개와 곱창나베, 샐러드 등등 배를 한껏 불릴 수 있는 맛있는 안주들이 나왔고 이 집의 시그니쳐인 닭 날개 요리는 내가 먹은 후쿠오카 여행에서 최고로 꼽을 정도로 맛이 있어서 신나는 부어라 마셔라에 나도 모르게 동참을 했다. 물론 속도는 계속 자제시켜야 했지만…
식당의 이름은 이것인데 안타깝게도 읽지를 못하겠다…
술에 취한 진상 남편과 10키로나 나가면서 유모차를 타기 싫다고 안아달라는 진상 딸을 밀고 끌어 숙소에 도착한 나는 씻지도 못한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조식은 한 번 더 먹고 싶었던 우설셋트를 먹었다. 역사에 슬램덩크 포스터가 붙어 있기에 검색하니 9층에서 영화상영을 한다고 했다. 뭔가 예전의 슬램덩크 재상영을 하는 것인가? 궁금해 하며 지나쳤는데… 나중에 한국와서 보니 슬램덩크 더 퍼스트 포스터였다!!!!! 알았다면 사진이라도 찍는 것인데 ㅠㅠ
수년전 다케이코 이노우에 원화 전시가 열릴 때도 전시 여부 자체도 몰라서 대작을 눈으로 볼 기회를 놓쳐서 너무 안타까워 했는데… 남편은 슬램덩크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어쩜 그럴 수 있지?
생일선물 같은 것 단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고 뭐 갖고 싶다고 한 적도 없었던 내가 처음으로 슬램덩크 소장본 전권을 사달라고 했는데 도서관에서 빌려보라는 얘기를 한다. 최저가로 떨어져 있던 중고 슬램덩크도 영화 개봉 이후 가격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치솟아 정상 판매가의 두 배로 팔리고 있는 것을 보자 더 심술이 난다.
잠시 길이 샜지만.. 어쨌건 여차저차 한국에 잘 돌아 왔고.. 그 길로 나는 감기몸살이 완전 심하게 걸려 3주를 앓고 새해를 맞았다. 하도 아파서 다 검사해보니 코로나도 독감도 아니었는데 아프기로는 코로나때보다 더 아팠던 것 같다.
나는 혼자가는 여행은 그 나름대로 좋고, 같이 가는 여행은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어서 좋아한다. 내심 이번 여행으로 남편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는데 내내 투닥거리며 다신 같이 여행하지 말자며 결론을 냈지만 사실은 꽤나 좋았다. 나도 여행이라면 어디 지지 않을만큼 많이 다닌 편인데 처음으로 여행하면서 지도를 보지 않고 조금 내려놓은 채 여유롭게 관광을 했던 것 같다. 그만큼의 무게로 내 남편이 많은 짐을 짊어진 덕분이겠지.
한 달 뒤면 복직이다. 우리 가족의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작은 적금 통장을 만들 생각에 또 다시 설레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