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출산 D-100일, “이 무렵 아기는 탯줄을 손으로 쥐기도 한다”

by moonshot

자녀 출산을 전후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지인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 역시 임신을 계기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같은 글귀를 접해도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신기할 따름이다. 언젠가 서울 시청 근처를 걷다가 건물 외벽에 걸린 시를 접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_ 정현종作 <방문객>


배 주위가 뭉치고 잦은 근육통에 소화 장애까지 찾아온 20주 차 무렵에는 사람 하나가 뱃속에서 커져 가고 있다는 존재감이 높아졌다. 임산부용 애플리케이션은 주차별로 갱신되는 메시지를 통해 ‘사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줘 소소한 재미를 선사했다. 23주 차가 되자 “눈썹이 나서 더 귀여워졌어요”라든지 “청력이 발달해 바깥소리를 더 잘 듣게 됐어요”같은 메시지를 내놓아 실감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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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더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간 자려고 누웠을 때만 느껴지던 태동이 낮에 더 활발한 패턴으로 바뀌었다. 아내는 일터에서 뱃속에 휴대폰 진동처럼 ‘드르럭~드르럭’ 거리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이모’, ‘삼촌’들의 ‘아나바다’ 행렬도 시작됐다. 한 자녀 가정이 보편적이다 보니, 어느 정도 자녀를 키운 집에서 놀고 있는 육아 용품을 기증하겠다고 나선 것. 덕분에 소소한 감사의 표시와 함께 지인들과 교류할 기회도 갖게 됐다. 아기 침대와 바운서, 유모차 같은 굵직한 것들을 해결하고 나니 든든해졌다. 미리 준비하는 습성인 부부들은 이 무렵부터 아기 용품을 본격적으로 장만한다는데, 우리는 “애 셋은 낳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안 하네”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게으를 따름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 더니, 답지하는 관심과 정성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산후 조리원과 계약해 ‘서비스’ 사진을 제공한다는 스튜디오에서는 주기별 촬영을 시작하자며 연락을 해 왔다. 무료촬영이라지만, 다른 부가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꽤 눈치가 보일 것 같아 포기했다. 대신 몇 년간 하지 않던 DSLR 촬영 취미를 겸사겸사 재개하기로 했다. ‘남들 다 가진’ 스튜디오 사진의 공백은 3D 피규어로 대체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생각했다. (결국 이것도 실천하진 않았다. 어마어마한 게으름!)


매주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다 보니 유독 20주 차 이후의 시간이 빠르게 갔다. 처서를 이틀 앞두고 출산 D-100일을 맞았는데, 임산부용 애플리케이션은 “이 무렵 아기는 탯줄을 손으로 쥐기도 한다”라고 알려 줬다. 생명 징후를 넘어서 스스로의 의지를 발현하는 행동이다 보니 설렘과 경이로움이 한층 더해졌다.


거동이 더 부담되기 전에, 우리는 태교 여행을 핑계 삼아 제주도로 향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셀프 촬영을 이어 갔지만, 볼록한 배 안에서 존재감을 뿜어내는 한 사람에 힘입어 4박 5일의 기록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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