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자뻑

(잠깐이겠지만) 아범은 지구방위대

by moonshot

육아를 핑계로 주변에서 ‘인생 가전’으로 꼽는 것들을 하나 둘 구입하게 됐다. 세탁물 건조기와 로봇 청소기를 순차적으로 들였다. 과연 듣던 대로 삶의 질이 한 계단씩 올라갔다.


봄에 이사했을 땐 몰랐는데, 남동향의 저층부 아파트는 실내가 꽤 습했다. 전에 살던 집은 남서향의 고층부 아파트여서 빨래를 실내에 널어도 바삭바삭한 수준까지 말랐었다. 상대적으로 일조량이 부족한 곳으로 이사 해 몇 달을 지내보니 빨래를 널 때마다 축축한 기운이 사람을 지치게 했다. 장마철이 시작되자 그동안 마음속 장바구니에 담았다 뺐다만 반복한 건조기 입양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영특한 놈이었다. 축축한 세탁물들이 잘 말린 황태포처럼 변신했다. 빨래 건조대 펼 일이 확 줄어드니 육아용품이 나뒹구는 실내도 조금은 정갈해졌다.


외출을 감행할 때 우렁각시 역할을 해 줄 로봇 청소기는 한여름에 들어왔다. 공기 청정기나 전동 킥보드를 통해 가성비를 익히 경험해 본 ‘좁쌀표(중국산)’를 샀다. 바닥 쓸기 임무를 부여하고 두어 시간 나갔다 오면 아내나 내가 했던 것 이상으로 청결해지니 엄지 척. 주말이면 게으름의 극한을 찍다가 청소 모드로 전환하는 게 무척 괴로웠는데, 들인 돈이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태어난 지 200일을 갓 넘어 모든 게 낯선 아들에겐 로봇청소기가 살아오면서(?) 겪은 최고 수준의 공포인 것 같았다. 동작할 때 “청소를 시작합니다”라는 음성, 투구게처럼 생긴 외관에 재빠르게 날름 대는 브러시는 외계 생명체를 연상케 했을 것이다. 작동 장면을 제대로 본 두 번째 청소 때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음을 터트렸다.

로봇청소기.jpg


아이를 엄마 품으로 옮기고 청소기를 따끔하게 혼내는 양 호통을 쳤다. 그리고 앱을 구동해 아들의 시선 밖으로 청소기를 이동시켰다.


청소기가 멀어질수록 아들의 입은 ‘헤~’ 벌어졌고, 찔끔 흐른 눈물이 맺힌 눈동자에 아비를 존경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이것이 가장의 권위라는 것인가? 몇 년이 지나면 위엄 있어 보이던 아빠도 흔한 동네 중년 남성일뿐이라는 걸 인지하겠지만, 그 순간 나는 외계 생명체의 침공을 이겨낸 지구방위대에 다름 아니었다.


몇 초 동안 겪은 자뻑의 맛이 꽤 달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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