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아유, 우리 강아지
어릴 적 나를 돌봐주셨던 외할머니가 자주 하신 표현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든지 유소년기에 ‘강아지’로 불린 기억 한 조각쯤은 품고 있을 테다. 그 호칭을 들을땐 별 생각이 없었다. 어린 생명체 중 주변에 흔한 것이 강아지다 보니 빗대어 그렇게 불렀으리라 짐작했을 따름. 아들이 태어나고 18개월간 양육을 해보니 ‘강아지’라는 애칭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적합한 표현이 등장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유는 이렇다.
뒤집기도 못하는 갓난 둥이 시절에 아기는 늘 “끼잉 끼잉”거린다. 눈 못 뜬 강아지들이 꼬물거리며 내는 소리와 비슷하다. 심지어 긴 극세사 섬유 같은 털의 질감까지 유사하다. 둘 다 젖비린내도 난다. 약하디 약한 포유류의 냄새.
앞니가 날 땐 잘 몰랐는데, 뾰족한 송곳니들이 솟아날 땐 다시 한번 더 강아지스러움을 느꼈다. 0.3mm 잉크펜의 끝단처럼 작은 표식이 선홍빛 잇몸 사이로 싹을 틔울 때면 고기를 찢어 먹겠다는 육식의 의지가 느껴진다. 어미젖을 뗄 때가 된 강아지들도 그 작은 송곳니로 늘 무언가를 찢고 씹어대지 않는가. 고기가 없으면 슬리퍼라도.
기저귀에 한 푸닥거리를 하고 난 뒤 씻어낸 엉덩이를 말릴 때면 그 또한 영락없는 강아지다. 알 궁둥이를 드러내고 ‘다다닷’ 뛰어다니거나 무언가에 열중해 엉덩이를 뒤로 쭉 뽑고 실룩대는 모습이 그렇다. 오동통한 살집에 솜털이 남은 강아지의 엉덩이. 기어코 입술을 갖다 대 “푸~~”하고 불거나 크게 한입 베어 물게끔 만드는 유혹의 아기 궁둥이.
키우다 보면 말귀를 알아먹고 뭔가를 해내는 모습에서도 둘의 공통점을 느낀다. 소소하게 “앞 발”하는 말에 반응하는 강아지와 “안 돼”, “주세요” 따위를 알아듣고 자신을 통제하는 아기의 모습은 용하디 용하다.
아들의 정수리에 자주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는다. 갓난 시절의 젖비린내는 기억에서도 희미해지고 있지만, 생후 18개월 아기가 여름날 열심히 움직여 뿜어내는 땀내는 그 나름 신록의 향기다. 똥을 눌 땐 작은 몸을 살짝 웅크리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맑은 눈동자는 허공을 향하고 야트막하게 "끄응" 소리를 낸다.
그래서일까? 그냥 강아지라고 부르기엔 어딘지 부족함이 느껴진다. ‘똥’을 붙여야 제맛이다.
우리 똥강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