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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이 할무니 Oct 22. 2021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냥냥 영화관

[스포일러 얼러트] 영화를 보신 후 읽어주세요!


이 글은 람쥐를 만나기 3년 전에 '나를 바꾸는 글쓰기' 강좌를 수강하면서, 과제로 제출한 글 입니다. 다묘 집사가 되고 보니, 이 영화를 선택하여 습작하다니.. 나도 모르게 람쥐와 묘연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나 의미를 부여하게 되네요.



일 년에 수십 편의 영화를 보다 보면, 불과 몇 달 전에 상영한 영화도 스토리가 가물가물 해진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영화를 생각한다. 심지어 기억이 희미 해지면 다시 찾아보면서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게 ‘관리’ 중이다. 수많은 영화 중에서 왜 유독 이 영화일까?

   

주인공 ‘나(사토 타케루)’는 하루를 더 살기 위해 소중한 무엇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무엇에 얽힌 추억, 관계까지 함께다. 홀연히 나타난, ‘나’와 똑같이 생긴 의문의 남자. 죽음이 두려운 ‘나’는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물론 무엇이 세상에서 사라질지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없다. 결정권자는 의문의 남자의 짓궂음이다.   


첫째 날은 전화기다. 더불어, 잘 못 걸려온 전화가 인연이 되었던 ‘나’의 첫사랑(미야자키 아오이)과의 추억도 사라진다.  

둘째 날은 영화다. 이로써 ‘나’와 학창 시절부터 영화로 우정을 쌓아온 ‘츠타야’라는 별명의 인생 친구(하마다 가쿠)와의 추억도 스펙터클한 CG 효과 속에 지워져 버린다.

셋째 날은 시계. 시계방을 운영하는 ‘나’의 아버지는 시계가 사라지면 어떤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일까.  


이 영화는 ‘나’에게 소중한 무엇과 그 무엇에 얽힌 추억이 박탈되는 과정에서 ‘내’가 추억들을 돌아보고 그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리고 영화 속 ‘나’의 여정을 따라 현실 속 나도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 속 상황이 마치 악몽 속을 헤매는 것처럼 나의 가슴을 조여 온다. 내 두 손이 묶여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다급한 상황이라거나,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는다거나, 학창 시절로 돌아가 시험지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풀 수 없다거나.   


도대체 어디까지 이 악몽이 지속되는 것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피로해질 때쯤, 드디어 고양이 차례가 되었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첫사랑, 절친, 아버지의 직업도 능가하는 소중한 그 어떤 추억을 가진 존재라는 것. 그 추억은 무엇일지, 다시 몰입하게 만드는 타이밍이다.   


이 영화는 죽음과 기억을 색다른 방식으로 다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를 떠올리게 만든다. 다만, 원더풀 라이프는 망자가 일주일이라는 기한 내에 자신의 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선택하고 그 기억만을 간직한 채 영면에 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설정이라면, 이 영화는 ‘나’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면서까지 가장 소중한 기억들을 강제로 회상하게 만든다는 점이 차이라고나 할까. ‘나’는 뇌종양 4기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래서 갑작스레 죽음의 문턱 앞에 선 젊은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설정은 가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무리 소중한 추억과 관계를 회복하게 해 준들, 이런 과도한 압박을 가하는 영화를 나는 왜 기억하고자 하는가. ‘원더풀 라이프’도 아니고 왜 이 영화 일까? 그건 아마도, 관계에 서툰 아버지가 보여 준 수줍은 사랑의 표현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너는 괜찮은 아이라며 어머니가 건네는 위로의 편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고양이 ‘캬베츠’와 영화 속 ‘나’의 가족이 처음 만나던 날은 가장 기억하고픈 장면이다.  


‘곤도와 캬베츠까?’  


관계에 서툰 아버지가 한 그 어설픈 사랑의 표현이라니. 측은하기도 하고, 마음이 따듯해지기도 하는 장면이다.  


내가 자란 시대의 한국의 아버지는 영화 속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의 나와 나의 아버지는 영화의 ‘나’와 ‘나’의 아버지처럼 표현에 서툴다. 물론 현실의 어머니도 영화 속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 아버지처럼 무심하고 관계에 서툰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괜찮은 아이라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시는 어머니.  


관계에 서툰 나의 삶은 영화 속 ‘나’의 삶처럼 오늘도 덜컹덜컹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아니 그 서툶의 정도가 영화보다 더욱 광범위하다. 아버지와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직장 동료, 학교 친구까지, 영화 속 ‘나’와 ‘나’의 아버지처럼 나는 오늘도 모든 관계 앞에서 서툴다.  


이 영화는 그런 나의 결핍에 면죄부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위로가 되지 않았나 싶다. 서툴지만 너도 따뜻해질 수 있다.    

고양이 '캬베츠'가 영화 속 '나'의 가족과 처음 만나던 날

‘히롯떼 꾸다사이!’  


나의 구원자는 숙희도, 캬베츠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것을 잘 알지만, 오늘도 이 영화가 건네는 작은 위로에 마음을 녹이고 싶다.  


이 영화 속 ‘나’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각자 어떤 깨달음을 얻을 만한 소소하지만 소소하지 않은 영화.   


2018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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