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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Nov 22. 2020

낯선 노래를 선곡하는 피디의 마음

라디오 음악이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을 위하여

라디오 피디에게 허용되는 

선곡의 자유는 얼마나 될까.


피디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생각보다 크게 자유롭진 못하다. 대부분은 프로그램 성격과 주 청취자들의 취향에 맞출 수밖에 없기 때문. 당연하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피디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청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같이 들어주는 이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트로트의 'ㅌ'도 좋아하지 않는 피디가 선곡표에 꼭 트로트를 넣기도 하고, 금요일 밤이면 꼭 '쇼미 더 머니'를 보는, 힙합에 죽고 못 사는 힙합 마니아인 피디가 랩이 들어가는 노래는 못 틀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라도 청취자 반응이 별로라면 그 선곡은 실패로 남을 테니까.


한 번씩 '오늘은 이거다' 싶어 선곡했는데 청취자에겐 먹히지 않는, '똥볼'차는 경험은 라디오 음악 피디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일이다.


사람이기에, 또 피디의 경험상, 감각상 '오늘은 이런 노래가 좋겠어' 싶은 곡을 선곡하기 때문에 피디의 생각이나 취향, 혹은 판단이 전혀 반영되지 않을 순 없지만 늘 주 청취자의 취향을 고려하여 선곡한다.


모두가 사랑하는 비지스. 물론 나도 사랑한다. (사진 출처는 위키피디아)

우리 프로의 주력 메뉴는 귀에 익은, 편안한 팝이다. 자주 출연하는 가수는 비틀스, 아바, 비지스, 퀸, 마이클 잭슨, 웨스트라이프 등등.


청취자들은 음악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에 담긴 추억을 듣는다. 잠시나마 퍽퍽한 현실을 떠나서 과거로 돌아가 추억 여행을 한다. 그래서 그날 아침이 특별하고,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시는 분들이 많기에 어떤 곡을 들으면 그렇게 좋아하실까 생각하며 선곡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ABBA의 'Dancing Queen’도 라디오를 통해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순간이 있었을 거다.


"지금 빌보드 차트를 휩쓸고 있는 노래죠. 한국에선 저희가 처음으로 들려드립니다. 아바의 댄싱퀸!"


이종환, 황인용, 김광한 등등... 전설적인 라디오 음악 DJ를 거쳐서 말이다.


몇 날 며칠 동안, 처음 들어본 그 노래를 잊지 못해 다시 그 노래가 나오길 기다리는 그런 경험. 청취자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몇 번이고 같은 곡이 선곡되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들. 비지스도, 아바도 퀸도 그렇게 소개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춘일 때 들었던 노래들은 누군가에게 평생의 플레이리스트로 남는다.


"예전 신촌의 ㅇㅇ 다방에서  노래를  많이 들려줬었어요. 친구들과 신청곡을 경쟁하듯이 적어내곤 누구 노래를 제일 먼저 틀어주나 귀를 쫑긋하며 기다리곤 했죠."


이런 사연들을 읽을 때마다 막연히 그, 그녀들의 그날들을 떠올리게 되고 일상의 작은 선물처럼 그 시간을 소환해드리고 싶은 거다.


 "음악이란 게, 서른 초반 되면 귀가 닫힌다고 하시더라. 내가 아직 닫힌 나이는 아니지만, 우리가 중고등학생 때 치열하게 들었던 노래와 무대들이 정말 깊은 감명을 준 것 같다."

방탄소년단 RM의 말


서른 초반이 되면 RM의 말처럼 정말 귀가 닫히는 것일까. 사실 나만 보더라도 과거만큼 새로운 곡에 잘 꽂히질 않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게다. 실제로 신청곡으로 꾸준히 들어오는 노래들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이제 정말 라디오를 통해 새로운 노래를 듣고,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줄어들겠구나 싶어 조금 씁쓸해진다. 지금의 청춘들에게 그 자리는 이제 유튜브가, 음원 사이트들이 대신해주고 있으니까. 낯선 노래를 선곡할 때 이 곡을 좋아하실까, 싶은 설렘과 동시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다.


Gavin James의 'Nervous', 불안과 우울, 고독이 넘치는 날 들으면 위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노래를 선곡하는 일을 포기할 순 없다. 얼마 전엔 아일랜드의 싱어송라이터 'Gavin James'의 'Nervous'를 틀었다. 어쿠스틱 버전으로. 아침이지만, 늦가을의 흐린 날이었으니까. 2016년에 나왔으니 나온지는 좀 된 노래지만 최근에서야 한국에서 조금씩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우리 청취자들에겐 처음 소개되는 생소한 곡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을 그 자체. 데미안 라이스나 샘 스미스를 처음 들었던 때처럼 설렘이 몰려왔다.


라디오를 통해 들릴 이 낯선 노래가 누군가의 심장에 파고들기를 기도하며 틀었다. 그날의 날씨와 그에게만 보이는 풍경과 만나 그의 삶의 한 순간을 그대로 박제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랐다.


시간의 제약이 있기에, 신청곡이 채택되는 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청취자들은 결국 남이 틀어주는 음악을 '하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것이 라디오 음악이다.


내가 아니라 '남'이 들려주는 음악이기 때문에 왜 저런 음악을 신청하나 짜증 나기도 하고 나라면 절대 오늘 틀지 않았을 음악도 듣게 된다. 하지만 그래서, 공감과 낯섦과 의문과 느낌표가 이어지는 짧은 여행이 되기도 한다.


그 순간에 우연히 그 자리에 나갔는데 당신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낯선 노래를 선곡할 때는 이미 당신이 가진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눈부신 이 늦가을 날을, 오늘의 서늘하고 코끝이 살짝 찡해지는 공기를, 처음 듣는 이 노래에 당신이 박제해주었으면 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2020년의 가을은 이 노래에 저장하세요."

.. 그런 마음이.


2020년의 가을에 1980년의 어떤 날을 추억해도 좋지만 2030년 즈음에 2020년의 가을을 떠올릴 노래도 한두 곡쯤,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프로에서 가끔 흘러나오는 낯선 노래가 당신에게 그런 곡이 되면 참 좋겠다.


아직 갈 길이 먼 피디라 결과는 별로일 때도 있(많)지만 선곡에는 언제나 진심이다. 요즘은 AI로도 선곡을 한다고 하지만, AI는 그런 순간의 진심은 따라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똥볼도 안 차겠지만. :-)  


기억한다. 어느 날 밤, 시원한 바람이 창을 타고 넘어오는 자정이 넘은 시각 라디오에서 나오던 Keane의 'Somewehre Only We Know'를 처음 들었던 순간을. 신의 계시처럼 가슴을 두드리던 그 음악을. 처음 듣는 목소리에 귀가 열리고 가슴이 뜨거워지던 그날의 냄새를. 그렇게 알게 된 그 노래를 하루 종일 혼자 들었던 섬에서의 기억을.


지금 라디오를 켜보시라.


어쩌면 거기엔 지난날의 청춘을 소환시켜줄 음악과 2020년의 가을을 떠올리게 해 줄 당신의 운명적인 노래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든 미래든 상관없이 아주 오랜 시간을 넘나들며 당신의 삶을 저장해 둘 그런 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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