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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Nov 29. 2020

마왕은 떠났지만,

고스 식구는 라디오의 힘을 믿는 피디로 살아갑니다.

신해철: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매일매일 삼시 세 끼를 어떻게 해야 입에 밥술을 넣을 수 있는가, 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내 인생에서 이것을 고민할 수 있다는 것. 그걸 고민할 수 있는 위치와 자리에 있다는 것. 그걸 고민할 수 있는 시기와 그 나이에 있다는 것. 청춘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본인은 이미 충분히 행복한 거예요.


숨바꼭질 혹은 물건 찾기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내 주머니에 넣고 있는 물건을 찾아서 헤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제가 제 작업실에서 제 라이터를 100시간을 수색했어요. 그런데 이 안에 전제조건은 분명 있어요.라이터란 존재한다, 이 방 안에. 말하자면 행복이란 것은 존재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100시간 정도를 제가 제 작업실을 수색했는데 제 작업실이 무슨 오만 평 되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 라이터가 안 나올 가능성이 있나요?


못 찾을 가능성? 한 가지밖에 없죠. 제 주머니에 들어있을 때. 내 주머니에 넣어 놓고 그 모든 책상 서랍 다 까뒤집고 책장 위로 들어 올리고 심지어는 책갈피에 있는 페이지까지 드르륵 다 뒤져 보고 정신병자처럼 뒤졌단 말이에요. 그런데 라이터가 안 나온다고요. 그럼 답은 뭐예요? 라이터는 존재하는데.


내 주머니에 들어 있잖아요.


신해철, 고스트네이션 중에서




그런 새벽들이 있었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잠이 오지 않고, 내 존재가 하찮게 느껴져서 창 밖으로 하늘이 파래지도록 잠 못 이루는 새벽들. 그럴 때면 라디오를 켰다.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을 듣기 위해서였다. 의지할 곳이 없을 때야말로 어떤 말이라도 간절히 듣고 싶어 지니까. 그런 밤에는 꼭 '고스'를 찾아갔다.


라디오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그걸 가르쳐준 여러 DJ가 있지만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마왕, 신해철이다.


그는 청취자를 '식구'라고 불렀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의 애칭인 ‘마왕’도 이곳에서 나왔다. 고스트 스테이션의 용어 사전이 따로 있을 정도로 게임이 그렇듯 고스를 들어본 사람만 알아듣는 말들이 따로 있었다. 어쩌다 현실 세계에서 대화를 나누다 그 용어가 나오고 그걸 또 알아듣는 사람을 만나면 같은 고스 식구라며 반가워했었으니까.


프로그램은 방송국과 시간대를 조금씩 바꿔가며 고스트 스테이션이 고스트네이션이 되기도 했지만 정체성은 한결같았다. 단순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는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겐 큰 위안이었을 것이다.


조금은 외롭고, 모났고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 조금은 '이방인'같다고 느끼는 이들이 거기 모여있었다.

그 유명한 시그널 송도 있지 않나.

 

"We are the children of darkness..."

(위아.. 더 칠드런 오브 다크니스..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이다...)


말하자면 밖에선 어떤 모습이든 스스로 생각하기엔 약간 어둠의 자식들에 가까운 이들이 모여서 그 안에서만큼은 소속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 공간감이 고스처럼 좁으면서도 깊은 경우를 아직까지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선 찾아본 적이 없다.


특히 신해철 본인이 상담해주던 '쫌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가 기억난다. 저런 얘길 방송에서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고민을 다룰 때가 많았는데 무엇보다, 신해철 특유의 뻔하지 않은 상담이 좋았다.


그중 기억나는 것 하나.  

한 청취자가 고민을 담아 사연을 보냈다.


남동생이 백수인데 매일 게임만 하고, 돈 벌 생각도 없고, 한심하기도 하고 앞날이 걱정된다는... 상담 사연이었다.


보통 DJ 였다면 '음... 남동생이 백수라니 걱정되시겠어요, 취직 준비도 안 해요? 아휴, 얼른 자리 잡아야 하는데.. 제 동생이라고 생각해도 속 터지네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처럼...

같이 사연 보낸 사람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해주며 역시 남동생이 문제라는 쪽으로 얘기를 풀어갔을 것이다.

아니면 걱정해서 뭐하겠냐, 때 되면 다 괜찮아질 테니 속 편히 생각해라 정도의 얘기를 했겠지만.. 그때 신해철은 단호히 말했다.  


여긴 그런 애들이 듣는 방송인데.
부모한테 네 자식 못났다 그러면
좋겠냐고.  


즉, 네 남동생, 아무 문제없다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걸 문제 삼는 당신이라는 이야기. 당연히 일반 DJ와 비슷한 답변을 기대하던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사연 보낸 사람의 기분이 걱정될 정도로. 내심 사연자의 고민에 공감했던 지라 왠지 모르게 좀 뜨끔하기도 했고.


신해철은 종종 그런 말을 했다. 인간에게 누구에게나 소명이 있다는 말이나 인생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인간은 수단이 아니고, 그저 태어나는 것 자체가, 신이 원하는 목적의 전부일 거라며 조물주가 우리 같이 하찮은 사이즈의 인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겠냐고.우주에서 봤을 때 우리는 아주 작은 존재일 뿐인데, 그런 작은 존재에게 책임이나 소명이 얼마나 크겠냐며 인생은 그저 보너스 게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태어나는 일, 그 소명을 다 해냈으니 이제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냐며.


또 그는 말했다.


'네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해줄 부모가 없는 사람은 그렇게 얘기해줄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 네 삶이 가치 없다고 누가 그래?'라는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보듬어줄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그는 라디오를 통해 그런 말을 들려줄 이가 없는 이들에게 대신 그런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되어주었다. 때론 '아, 이런 것 까지 포용해준다고?' 싶은 범주의 고민들까지도 그는 받아들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백수 동생을 걱정하는 (일반인) 사연자 누나가 아니라 사연자의 동생인 (이방인) 백수 남동생 편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라디오 너머로 듣고 있을 많은 백수들을 위해서 수많은 이방인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스트 스테이션 안에서 많은 이들은 본인의 찌질함을 고백하고 웃어대며 밤의 어둠과 우울을 견디곤 했었다.

그가 이후 백분토론에 출연하거나 내 기준에선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때도 마음속 한 구석엔 그에 대한 고마움이 있었기에 동조할 순 없어도 비난도 하지 못했다. 내 초라함을 위로해준 그에게 늘 고마움이 있었으니까.


라디오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싶을 때면 어김없이 제일 먼저 그가 떠오르는 이유다. 그는 고스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현실에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모아 두고 쉬게 했다. 스스로가 기꺼이 그 세계의 안내자이자 구심점이 됐다.


행복은 뭘 이뤄야 오는 게 아니라고.

태어났고 할 일 다 했으니

그냥 행복하게 살라고.

아프지도 말고.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면서...


https://pixabay.com/photos/radio-old-nostalgia-retro-music-1594819/


그는 너무나 황망히 떠나버렸고. 그 어둡고 따뜻한 세계에 잠시나마 위로받던 나는 이제 라디오 피디가 되어, 출근길 음악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그에게 빚진 자의 마음으로 다시 라디오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청취자가 원하면 언제든 그 시간에 그 자리에 든든히 있어주는 것. 밖에서 누구이고 어떤 시간을 보냈든 그 시간만큼은 음악과 말로 조금의 위안이라도 드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고 있다.


혼자일 때, 외로울 때, 약간의 소속감이나마, 우리 프로의 식구라는 작은 정체성이나마 드릴 수 있으면 좋겠고 우리 프로를 듣는 것이 자랑까지는 아니어도 부끄럽진 않았으면 좋겠다.


출근길이든, 집에서 맞는 아침이든 걱정으로 잠 못 이룬 채 맞는 그런 아침에 우리 프로가 조금의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엔 이 음악으로 행복해지세요. 힘들게 잘 태어났으니 할 일은 다 했고, 그런데도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또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거면 다 된 거잖아요.


고스에서 그에게 배웠던 그 가르침을 마음으로나마 전하고 싶다. 아, 근데 그도 우리 프로 주력 메뉴인 올드팝을 좋아해 주려나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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