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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Apr 03. 2021

"아버지를 잘 모르네. 잘 모르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꽃을 선물했다

봄이 시작되면서 방송에서 봄맞이 이벤트를 했다. 주변에서 '노랑'을 발견해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십사 했다. 청취자들께선 이 작은 이벤트에 감사하게도 많이들 참여해주셨다. 장롱에 묻어둔 노랑 재킷을 꺼내 용기 내서 입은 사진이라며 보내주시기도 했고, 노란색 옷을 입은 아기가 하트를 하고 있는 사진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우리 곁에 노랑은 생각보다 많았다. 계란 프라이 속 노른자, 앙증맞은 앵무새, 먹음직스러운 계란말이, 부모님의 오래된 금빛 이불, 열심히 써오셨음이 분명한 고무장갑, 싱싱한 콩나물, 노랑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싱그런 노란색 운동화, 무엇보다 봄의 전령사인 프리지아 꽃이 있었다.  어떤 분께선 방송을 들으시곤 프리지아 꽃다발을 사서 들고 들어가시는 중이라 했다.


그 사연을 읽고 나도 꽃다발을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엔 물론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전부터 꽃을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든 집에 꽃 화분을 두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때는 아침마다 마당에 꽃과 안부를 나누며 돌보는 게 일과였다. 마당이 없고, 조금 어두워진 집으로 이사해서도 가장 밝은 베란다에 화분들을 두고 키우고 계신다. 잘 걷지도 못하면서 꽃에게 물을 주는 건 그렇게나 열심이다. 힘들면 아버지라도 시켜서 꽃을 돌본다. 안 그래도 걷기 힘들어하시는데 코로나까지 겹쳐 많이 돌아다니지도 못하니 봄을 선물해야지 했다.


꽃집에 가니  냄새가 나는  같았다. 프리지아를 섞어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달라 했다. 3 원짜리 만들어주세요, 했다가 만원을  보태 4 원짜리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4 원이라는 돈으로 봄을 집에 들여다 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부신 계절의 빛깔을 어두운  안으로 들일  있다면 그리 비싼 값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꽃을 살 때는 엄마를 위해서였다.


아버지를 위해선 아무 이유 없이 꽃을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두어 달 전쯤, 아버지의 치매 인지 검사 때 병원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아버지를 잘 모르네. 잘 모르죠?"라고. 그 말에 순간 당혹스러웠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아버지를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바로 곁에 살면서 매일 오가고 있질 않은가. 조금은 속이 상했다. 잘 알거든요? 아버지는 매우 고집이 세고 어려운 일은 모두 엄마에게 미루던 사람. 고생이라곤 모르는 사람. 병원 한 번 가는 일로 내가 미치기 직전까지 화를 내야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그렇지만 농담을 잘하고 재치 있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얄미운 사람.


지난 글에도 썼지만 아버지가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은 후 우리 부녀 사이는 역대 가장 평화롭다.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들은 인지 능력은 떨어졌지만 누가 본인을 싫어하는 감정이나 귀찮아하는 감정은 잘 느끼므로, 무조건 웃어주고 동조해주고 편 들어주라고 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지침에 잘 따르고 있다. 잔소리를 줄였다. 예전엔 “내가 한번 쓴 마스크 다시 쓰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했지만 지금은 “아버지, 그 (며칠이나 쓴 것 같은) 마스크 나한테 주면 안 돼? 내가 갖고 싶어서 그래.” 하며 어르고 달래서 받은 후 버린다. 혹은 아버지 모르게 아버지 주머니 속 마스크를 새것으로 바꿔치기해놓거나.


나는 늘, 아버지에게 잔소리꾼이었다. 우리 부녀의 대화는 주로 나의 잔소리에 아버지가 불편하게 답하는 식으로 끝났다. 이를테면 내가 치과에 가서 충치 치료를 받으셔야 한다거나,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하시니 음식을 나를 때 제발 도와주시라든가 하는 잔소리를 하면 아버지가 듣기 싫어 불평을 토로하는 식이었다.


아버지를 보면 늘 고쳐야 할 점만 보였다. 어릴 때부터 내게 의지할 곳은, 집을 그나마 집답게 만들어준 분은 엄마였으니 당연하다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의 미덕을 최대로 누린,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아니라 일찍부터 내가 돌봐야 할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힘들게 식당을 할 때 카운터나 잠시 보다가 서점에 책을 읽으러 나가는 전형적인 한량이었다. 착한 사람이다. 그러나 작은 스트레스도 견디지 못했다. 엄마가 응급실에 갔을 때도 실제로 하는 일은 별로 없이 그저 불안해했다. 의사를 만나는 일부터 입원 수속, 간병까지 모두가 내 일이었다. 불안한 상황을 감내하기 힘들었던 아버지는 어느 정도 위급한 상황이 지나자 그저 '다 잘 된 일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여전히 모든 상황이 안 좋은데도 다 괜찮다며 내게 모든 책임을 미뤘다. 그럴 때 진심으로 화가 났다.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본인만 안심시키기 위한 말처럼 들렸다. 모든 게 버거웠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올라가길 기다리는 엄마의 물건들을 챙기러 홀로 잠시 집에 갔던 그날 새벽. 계단에서 난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를 보면 자주 못마땅했다. 나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투덜대곤 했다.


'아버지를 잘 모르네'라는 병원 선생님의 말이 내 가슴을 깊숙이 찌른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음속으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나 원망이 쌓여 어느 순간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는 걸. 엄마가 계속 아팠다는 이유로 무엇이든 아버지보다 우선해왔다는 걸. 가족들이 다 듣는 자리에서 내 좋은 부분은 엄마를, 나쁜 부분은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도 심심찮게 하는 나쁜 딸이었다. 아버지는 그마저도 유쾌하게 웃어넘겼지만.


그러니 꽃을 살 때는 늘 엄마를 위해서 샀던 것이다.


경도인지장애를 지나 결국 치매에 이른 아버지를 다시, 찬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제 여든두 살의 노인이 된 아버지를. 무조건 화내지 말고 웃으며 바라본다는 원칙을 세우고 다시 본 아버지는 그간 내가 알았던 사람과는 또 달랐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버지도 엄마 못지않게 꽃을 좋아한다는 걸. 꽃을 보면 그 생김새와 피어난 모양을 보고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 향기에 감탄하며 꽃병과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까지 섬세하게 보고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꼈다. 내가 정말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꽃을 든 아버지를 그렸다.


아버지에게 꽃을 내밀었다.


봄이라서 샀다고. 내가 사 온 꽃다발을 엄마가 아닌 아버지가 먼저 안은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활짝 웃었다. 노랑 프리지아에 뒤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봄을 닮은 활짝 핀 웃음이었다. 그래. 아버지는 정말 저렇게 밝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내가 정말 어려울 때 나를 안심시키던 건 아버지의 저 대책 없는 웃음이기도 했다. 내가 백수였던 시절에도 아버지는 그냥 '다 괜찮다'라고 하셨다. 인턴으로 일할 때 월급이 너무 적다고 하자 '일을 배우는 중이지 않느냐, 학교를 다니는데 심지어 돈까지 주니 얼마나 좋으냐'며 안심시켜준 것도, '사람은 쓸데없는 헛소리를 자주 하면서 살아야 한다'라고 농담을 건네던 것도 아버지였다.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 아버지는 간병을 나와 나눠서 하시진 않았지만, 하루에 한 번씩 꼭 엄마를 보러 와서 계속 그 곁에 앉아있곤 했다. 그랬다. 불안이나 고통에 대한 역치가 낮은 분이지만 본인의 그릇만큼은 최선을 다해 노력해왔다. 그저 어른에게 의지하고픈 내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은 때로 최후에야 생겨나기도 한다.


가족처럼 아주 익숙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더 그렇다. 의문이 생겨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니까. 그런 순간은 정말 늦게, 간신히 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엄마의 귀함을 뼛속까지 알게 된 것도 엄마가 아프면서였다. 아버지가 아프고 난 후, 점점 더 많은 그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아버지는 꽃병의 위치를 조심조심 옮겨두는 사람이고, 누가 집 앞 화단에 심어둔 꽃을 훔쳐가면 엄마보다 훨씬 더 오래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아버지와 동행하는 이 길이 앞으로 어떨지 알 수 없다. 오늘 먹은 음식도 기억하기 어려워하는 아버지는 어쩌면 그날 내가 프리지아를 안겼다는 사실도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여준 미소는 내게 기억되었다. 앞으로의 길은 멀고도 험할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그 미소 하나를 이정표 삼아 또 걸어갈 것이다. 그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환하게 빛나는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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