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과 Falling 을 함께 듣는 개편 즈음의 밤
봄 개편 시즌이다.
언제나 개편이 다가오면 개편 전 한 달 정도는 두 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느낌이 든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와 앞으로 가야 할 프로. 그 둘 사이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기분이다.
둘 사이의 이질감이 클수록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싶을 때가 많다.
이제 친근해진 팝의 세계를 떠나 아직 많이 낯선 클래식의 세계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내 운명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이 여정의 의미는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겠고 지금은 그저 갈 시간이 됐구나 싶다.
프로를 계속 돌아다니는 건 라디오 PD의 숙명 같은 일이니까.
요즘은 계속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아직 몸은 이곳에 있지만 내가 타야 하는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겠지.
사실 이미 마음은 가야 할 곳을 향해서 먼저 출발했는지도 모르겠다.
낯섦, 불안, 기대감, 흥분, 걱정이 속에서 계속 반복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과 저곳을 오간다.
요즘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그래서 팝과 클래식이 공존한다.
랜덤 모드로 평소에 만들어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두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종종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 선물처럼 들려올 때가 있다.
오늘은 쇼팽의 녹턴 Op.9의 2번을 들었는데 다음 곡으로 해리 스타일스(Harry Styles)의 'Falling'이 흘러나왔을 때가 그랬다.
두 곡 모두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곡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와 현실의 괴로움이 뒤섞여 만들어진 그런 곡들.
쇼팽의 첫사랑 이야기. 쇼팽은 같은 학교에서 만난 콘스탄차를 사랑했다. 성악을 하는 그녀를 생각하며 평소엔 손도 대지 않았던 가곡을 작곡하고, 노래할 때 피아노 반주도 해주었다고 한다. 매일밤 그녀의 꿈을 꾸고 작곡을 할 정도로 많이 좋아하지만 끝내 고백은 하지 못한다. 고백은커녕 말조차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그녀의 곁을 떠난다. 조국인 폴란드를 떠나 음악의 중심지였던 빈으로 향한다. 쇼팽이 빈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시기, 폴란드에선 혁명이 일어난다.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걱정과 혁명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책으로 괴로워하던 그 시기에 만든 곡이 바로 녹턴 Op.9-2. 콘스탄차에 대한 그리움과 조국 폴란드에 대한 걱정이 담긴 곡이다.
해리 스타일스의 Falling 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노래한다. 끝나버린 관계를 되돌릴 수 없음을 알지만 그녀가 두고 간 짐도 풀 수 없는 상태. 나는 누굴까, 지금의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네가 나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기 싫어하면 어쩌지,라고 노래한다. 너에겐 이제 내가 필요하지 않을 거라며 계속 떨어지는 (Falling) 마음을 노래한다. '내가 너에 대한 노래를 너무 많이 썼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라는 말도 덧붙여가며.
Falling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이 곡의 가사와 분위기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피아노 앞에서 노래하는 남자의 주변으로 물이 계속 쉴 틈 없이 새어 들어온다. 물의 양도 많고 들어오는 속도도 빠르다. 보는 사람이 불안해진다. 역시나 예감대로 물은 남자의 얼굴까지 점점 차오르고 결국 온 공간을 잠식한다. 제발 누군가 와서 저 사람을 꺼내줬으면. 아니면 남자가 빨리 어떻게든 거기서 탈출했으면 싶다. 그러나 물이 차오르든 말든 피아노 앞에서 노래하던 남자는 끝내 물속에 잠긴다.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런 남자의 얼굴 위로 빛이 비친다. 물 밖에는 빛이, 세상이 있지만 남자는 굳이 물 위로 올라가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삶을 잠식하는 괴로움과 그리움. 그 와중에 빛이라고는 말조차 건네지 못한 사랑뿐이었을 쇼팽. 사랑하는 여자에게 말 한마디 건넬 용기조차 없이 소심하게 피아노 앞에서만 진심을 풀어냈을 쇼팽. 쇼팽이 보낸 밤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차오르는 물속으로 잠기는 몸과 마음. 그 물 밖으로 나갈 힘도 의지도 없이 막연히 저 밖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좇는 기분. 그런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서 녹턴을 만들며 읊조렸을 혼자만의 시간. 해리 스타일스의 Falling을 들으며 쇼팽의 녹턴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해보는 밤이다.
쇼팽과 해리 스타일스. 시대도 장르도 다르지만 결국 사람의 이야기고 사람의 음악이다. 그리움을 말하는 인간의 음악. 그렇게 다가가다 보면 조금씩 이해할 거라고 믿어본다. 첫 마음. 라디오 PD를 꿈꿀 때 가졌던 마음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렇게 또 열심히 떠날 준비를 하고 새로운 곳에 도착해서 또 살아가다 보면.. 이 밤들도 지나가겠지. 그러니 걱정보단 막연하게 느껴지는 빛을 향해 가야겠다고 다짐하는 밤이다. 아직 나에게 와닿지 않지만, 이끄는 빛이 거기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