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매일의 고백.
새벽 출근이 점점 힘들어지는 계절이다. 요 며칠은 정말 추워서 떨면서 출근했다.
아침 프로를 맡은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방송이 7시에 시작되니 6시에는 도착해서 준비해야 한다.
전날 어느 정도 방송 준비는 끝내 놓지만 뉴스 코너가 있으니 아침엔 뉴스도 봐야 하고 원고와 날씨도 체크해야 한다. 선곡도 다시 배열하거나 바꾸거나.. 하면서 방송 시작 전까지 나름대로 분주하게 시간을 보낸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 있다는 게 안정감을 준다. 힘들 때일수록 더..
작년 가을에도 그랬다.
허리 골절로 입원했던 엄마는, 입원했을 때도 그랬지만 퇴원 후에도 마약성 진통제 부작용으로 이상한 행동을 보이시곤 했다. 출근하기 전에, 그리고 퇴근하면서 부모님 집에 들러서 상태를 한 번씩 확인했다.
어느 날 아침, 엄마는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
"너희 엄마가 출근하는 건 알았는데, 너도 방송국으로 출근하니?" 같은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이웃집 딸의 이미지와 내가 방송국으로 출근한다는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여서 나온 말 같았다.
가슴이 무너졌다.
언젠가 엄마가 날 정말로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딸로 생각하고 처음 보는 낯선 눈빛을 던진다면.. 애써 불안을 감추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엄마, 나잖아. 엄마 딸." 하고 말했다. 그제야 엄마는 그런가,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즈음에 엄마는 아버지를 보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로 잘못 인식하기도 했다. 한 번은 엄마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나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러더니 "우리 엄마인가?" 하더니 다시 "엄마가 아닌가? 아빠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이 엄마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새벽들엔 엄마를 다독이고 다시 출근을 했다.
결국 달래야 했던 건.. 다독여야 했던 건 내 마음이었지만.
그런 새벽에도 방송은 7시면 어김없이 시작됐다.
일단 방송이 시작되면 내 하루가 아닌 다른 이들, 청취자들의 하루가 나에게 밀려오면서 내 어두운 마음은 잠시 한쪽으로 미뤄두고 또 하루를 열 수 있었다.
적어도 방송하는 시간만큼은 나는 방송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것들은 조금 나중으로 미뤄두어야 하니까. 특히 우리 방송 시간대에는 다들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 사연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그분들과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작년에 여러 가지 일로 너무 힘들어서 휴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 매일의 일상이, 매일 지속되는 두 시간이 있어서 나의 하루가 계속되고, 내 삶이 이어지고.. 더듬더듬..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걸어가는 것 같아서 눈물겹게 감사할 때가 있다. 붙들고 갈 수 있는 무언가. 길을 잃지 않게 해 준 나의 일이 고마워서.
올해 초에 상담을 받으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수없이 많은 선으로 묶여있는 것 같다고. 그 선들은 내가 맡은 수많은 역할들이고 매일매일 가면을 바꾸듯 책임감으로 역할을 바꿔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사라지고 역할만 남은 것 같았지만. 결국 다들 그렇게 살아가지 않냐고.
그러고 보면 내가 상담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이게 진짜 힘든 일 맞아요? 안 힘든 상황인데 제가 힘들어하는 거 아닐까요?"였다.
선생님은 그렇게 묻는 나에게 “제가 OO 씨 상황이었다면 그중 하나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라고 해주셨는데 그 말씀이.. 굉장히 위로가 되었었다. 이게 힘든 상황이긴 하구나. 그러면 힘들어도 되겠다는.. 힘들어도 되는 자격 같은 걸 부여받은 것 같아서.
올해엔 내 역할들이 아니라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던 날들이 많았다. 웃고 울고 아파하고 눈부시게 빛났다가 떨어지는 마음. 공허하게 추락하다 다시 떠오르고 날아가는 내 마음. 내 마음이 공중 산책을 하듯이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역할이 아닌 내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날들에도 다시 아침 7시면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불완전한 내가 매일 하루를 살아가고 견디고 사랑하고 아파하면서 만드는 방송이 누군가의 하루에도 가 닿아서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보이진 않겠지만, 저도 여기서 견디며 살아가요.
오늘 새벽.. 너무 추워요. 출근하면서 감기 걸릴 것 같아요. 따뜻하게 입고 나가요. 옷 하나 더 껴입어요. 얇은 패딩도 괜찮아요.' 같은 말들을, 방송으로 건네고 음악으로 전하면서. 듣는 이에게 건네는 매일의 고백이자, 다짐을 담아서.
얼마나 더 아침 방송을 맡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내 매일이 방송에 스며들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 그래도 다시 감사해진다.
그리고 다시 가을이다.
가을맞이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는 까뮈의 글을 보았다.
얼마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면 이럴까.
나에게 그랬듯이 누군가에게도 이 말이 위로가 되겠지.
아니. 지금도 봄이야.
돌아보면 꼭 그럴 거야.
모든 잎이 꽃이 되고 떨어지는 가을에 다시 봄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