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리히터 / On The Nature Of Daylight
"저는 가능한 한 가장 어두운 재료로 아주 찬란하게 빛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과정은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작업(연금술)과 비슷했습니다."
1.
어떤 음악을 만나는 건 인연과 비슷하다.
어느 날 갑자기 전에 없이 마음에 다가온다.
올해는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이 그랬다.
음악이 들리지 않던 시간 동안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빛 같은 곡이었다.
원래는 가사에 꽂힐 때가 많은 편인데 이 곡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 곡의 어떤 부분에 매료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희한한 곡이었다.
왜 이렇게 위안이 되는지...
https://youtu.be/rVN1B-tUpgs?si=hH9wjUgy2kE-SkLA
'가능한 가장 어두운 재료로 아주 찬란하게 빛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리히터의 말을 듣는 순간.. 이 곡에 그렇게 끌렸던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밝음', '빛'.. 같은 단어를 떠올려 본다.
햇살이 쏟아지는 한낮에 창문을 열면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화사한 밝음을 닮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밝음. 쨍한 밝음.
그건 어둠을 모르는 밝음이다.
반면에 세상엔 칠흑 같은 밤에 태우는 초 한 자루의 빛 같은 밝음도 존재한다.
어둠이라는 전제, 전사가 필요한 밝음.
어둠을 아는 밝음이다.
터널을 빠져나와 빛을 마주하는 순간.
전쟁터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놀이 소리.
죽음을 앞두고 던지는 농담.
어둠을 품은 빛. 어둠이 스민 빛. 어둠과 공존하는 빛.
아무 것도 들리지 않던 마음에 한 줄기 빛처럼 뚫고 들어온 곡은 그런 빛을 닮았다.
작곡가가 작품으로 도달하려고 했던 찬란함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리히터는 피콜로나 리코더처럼 즉각적으로 밝은 인상이 떠오르는 악기가 아닌 무거운 현악기로 찬란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무리하게 장조의 밝은 음을 연주하지도 않는다.
그저 어둠을 가만히 관조하듯이.. 천천히 느리고 무겁게 반복되는 선율을 연주한다.
그 반복되는 선율이 큰 위로가 되었다.
가장 아픈 부분에 내려앉아서 매만져주는 느낌이었다.
어둠을 부정하지 않고 빠져나오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지긋이 바라보고 흘려보내는 듯한 마음이 느껴졌다.
리히터가 원했던 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곡을 듣고 나는 어둠을 더는 어둡지 않다고 느끼는 강한 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쩌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은
가장 어두운 날들 속에 있을지 모른다고.
신이 인간에게 고난을 줄 때는 어떤 마음일까.
인간을 사랑한다면 리히터가 이 곡을 작곡했을 때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두운 악기의 소리로 찬란하게 빛나는 음악을 만들듯 올해 나의 어둡던 하루들도 잘 이어 붙이면
나름대로 빛나는 한 해로 기억할 수 있을까.
2.
여기서부터는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두는..
올해의 어둡고 찬란했던 몇 가지 장면들이다.
최근에 인상 깊었던 순간은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 비뇨기과에 갔을 때였다.
검사를 위해 아버지가 소변을 보셔야 했는데 실수로 그만 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페이퍼 타올로 여러 번 바닥을 열심히 닦으며 생각했다.
'내가 나쁜 사람일리가 없잖아.'
그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처음 듣는 마음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긍정하고 항변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올 한 해 내내 아니 어쩌면 이 나이까지 이르는 동안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왔던 것 같다.
자신 있게 답하고 싶어서 고군분투해 왔지만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없는 사람이 아닐까라는 의문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뜻밖의 순간에.. 적어도 내가 나쁜 사람일리는 없다는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어떤 면이 조금 부족한 사람일 순 있어도.
처음으로 들어본 그 목소리엔 스스로를 다독이는 힘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다시 걸어가자는.
두 번째로..
정말 낯선 새 프로그램을 배당받아 맨 땅에 헤딩하듯이 일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모든 게 0에 수렴하던 그때 스튜디오에 박혀 하루에 12시간이 넘도록 일했던 날들.
점심 먹고 들어오면 도저히 그날 일을 마칠 수가 없어 밥도 자주 걸렀다.
생일에도 점심조차 못 먹고 일했던 날들이었으니까.
이제 조금 프로그램에 익숙해진 지금… 돌아보면
그 순간들이 내게 남긴 건 명예나 성과 같은 외부의 인정이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회복이었다.
그 마음이 있어야 외부에서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올해 얼마나 바닥이었는지, 다 그만두고 싶었는지, 숨 쉬고 싶지 않았는지, 마디마디마다 저려왔던 마음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게 먹먹하던 날들이었다.
하루치의 일만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음마부터 배워서 걷고 싶었지만
단거리 선수처럼 달려야 하는 날들도 많았다.
걸을 준비도 안 된 사람이 미친 듯이 달려야 했으니 숨 가빴던 날들이었다.
그때 만났던 게 리히터의 음악이었다.
그리고 어떤 음악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 바로 마음에 와닿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언어는 무언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데 오히려 가끔은 방해가 된다는 것도.
그 시간 동안 머리를 처박고 일한 결과,
나름대로 이제는 조금씩 재미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디에 있든 살 수는 있을 거라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 아는 건 나뿐이기에...
내 수고로움을 진정으로 알아줄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도 배웠다.
제일 못했던 일이다.
남들은 잘 위로하면서 힘들고 초라한 나는 외면하고 덮어만 두고 싶었다.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났던 날들.
넘고 또 오르고 넘었던 날들.
자책과 미움과 원망과 실망에 불타던 날들…
잘 견뎠다. 수고했다.
3.
가장 어두운 마음을 안고 빛을 향해 걸어가던 한 해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 시간을 지나 까만 쇳덩이 같은 내게 금처럼 빛나는 부분이 조금 생겼을지 모른다고.
계속 걷게 해 준 순간과 사람들에 감사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올해의 남은 날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