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선 Oct 01. 2022

베란다를 뒤집어엎었다


가끔씩 이유 없이 복잡하고 심란할 때가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 내면에서 찾아보려 애쓰다 나만큼이나 심란한 집안 구석구석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이번 나의 시선은 베란다로 꽂혔다. 베란다를 뒤집어엎어보자.


거실과 안방에는 기다랗게 이어진 베란다가 있다. 그곳에는 캠핑용품으로 시작해서 커다란 로잉머신, 스텝퍼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커다란 5단짜리 정리 선반 2개, 3단짜리 1개, 조그만 책장, 아이들과 나의 당장 보지 않는 책들이 이쪽저쪽 분산되어 있었다. 선반 위에는 쌓아놓은 라면과 생수병, 음료와 과자, 휴지와 키친타월, 쓰지 않는 카펫까지. 그리고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유모차가 수북이 쌓인 먼지와 웅크리고 있었다.

나만큼이나 심란한 이 베란다를 탈탈 털어버리고 말겠다는 각오로 목장갑까지 사놨다. 목장갑을 야무지게 손에 끼고 시작이다. 시작은 안 쓰는 물건 처분하기.



-처분한 물건들
부러진 물걸레 청소기, 돌돌이 청소기, 벽 선반, 보냉 가방, 카펫, 매트,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활동지 일부(상당히 많은 양), 다 푼 문제집들, 로잉머신, 유모차, 킥보드



고장 나고 낡아서 못쓰는 물건들은 과감하게 처분한다. 구청에 신고하고 버린 물건도 있고 당근 마켓에 글을 올려 판매를 기다리고 있는 물건도 있다. 일주일째 커다란 로잉머신이 거실 티브이 앞에 자리 잡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답답하지만 일단 잠시 눈감아보기로 한다.




집안일과 정리정돈을 잘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뒤집어엎는 건 자신 있다. 지금 당장 우리 집에 필요한 물건과 불필요한 물건을 구분해 처분하고, 청소하고, 재배치하는 데엔 도가 텄다. 군인 남편과의 결혼 9년 차에 7번의 이사로 다져진 내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공에도 집에 무슨 짐이 이렇게 많냐고 하면 나름 할 말이 있다. 이사 다닐 때마다 그 집에 맞춰 필요한 물건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베란다가 있는 집, 없는 집, 화장실이 두 개인 집, 한 개인 집, 방이 3개인 집, 2개인 집, 수납공간이 하나도 없던 집, 펜트리가 있던 집. 많은 군인관사로 이사 다니며 그 집에 맞춰 수납장이나 베란다 용품을 사게 되는데 다음 이사를 갔을 땐  필요 없어지기도 하고 또 필요해지는 물건이 생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집을 뒤집어엎었다. 좁은 집을 조금이라도 넓게 쓰기 위해 혼자서 무거운 가구들을 이리저리 옮겨보는 게 취미가 됐을 정도다. 하루 이틀 이방 저 방 뒤집어엎어 가구 배치까지 끝내 놓으면 마치 새 출발을 하는 기분처럼 홀가분하고 뿌듯했다.


이번 집은 조금 길게 살고 있다. 7번의 이사를 8~12개월의 기간마다 했다면 지금은 2년 하고도 6개월째 살고 있다. 2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그동안 살았던 집중에 가장 오랜 시간이라 그만큼 많은 짐이 쌓여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베란다 정리는 하루 이틀 만에 끝나지 않고 있다.

벌써 일주일 넘게 진행 중이다. 캠핑용 냉장고는 안방 침대 옆에, 쌀포대는 피아노 옆에, 생수병들은 거실 한편에. 정리되어가는 베란다 대신 집안이 엉망이 되고 있다.


어제는 구매해 놓은 롤 매트를 베란다 전체 사이즈에 맞게 재단해 깔았다. 오늘은 버려야 할 아이들의 다 푼 문제집들을 꺼내 바닥에 쌓아놓았다. 분리수거 날이 돌아오면 집 밖으로 내보내질 또 다른 물건들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다. 베란다가 정리되어 갈수록 마음도 정리되는 기분이다.


가끔씩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야 할 감정까지 꾸역꾸역 가지고서 괴로워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집 한 부분을 죄다 끄집어내 정리하고 나면 단정해진 집처럼 매끈하게 정돈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우울함 극복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청소해야 할 창문이 눈에 거슬린다. 그래도 좋다! 베란다를 편하게 걸어다닐 수 있게 되다니!




아침과 오후, 저녁엔 아이 둘과 복닥거리느라 정리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매일 조금씩 정리 중이었던 나에게 조금 속도를 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돌아오는 금요일, 시부모님이 오신단다. 전라남도에서 서울까지. 서울에서 모임이 있으셔서 며칠간 우리 집에 머무르실 예정이라고 했다.

정리해야 할 공간이 늘어났다. 베란다에서 집 전체로. 침대 옆에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놀이방에 장난감들, 화장대 위, 주방 수납장과 냉장고 안까지. 글로 써놓고 보니 남은 시간 안에 다 정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오늘부터 목장갑을 끼고 다시 시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 하나를 내어놓는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