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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선 Oct 18. 2022

가을이니까, 초콜릿을 사야 합니다



가을. 참으로 두려운 계절이다. 춥고 괴로운 겨울을 예고하러 다가온듯한 가을은 차가운 바람을 무기 삼아 자꾸만 위협한다.


결혼 전만 해도 가을은 설레는 계절이었다. 숨 막히던 여름이 지나고 시원하게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올 때면 얇은 재킷과 단화 한 켤레를 꺼내어 놓고 현관문 앞에서 괜스레 두근거렸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에 고개를 들어보았다가 새파란 가을 하늘에 넋을 놓기도 했다. 그러다 부풀어 오르는 마음에 경쾌한 발걸음으로 바스락거리며 다기도 했었다.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내 곁에 아이들이 생긴 후엔 예전처럼 사색에 잠길만한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

찬바람은 불어오고 힘없는 나뭇잎들은 아파트 단지 내에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나는 봉지 하나를 들고 예쁜 나뭇잎을 찾아다녔다. 노란색, 빨간색, 갈색. 둘째 아이는 색깔도 모양도 다른 예쁜 나뭇잎들을 주워 어린이집에 가져간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그런 아이의 뒤를 쫓아 아침마다 함께 나뭇잎을 주웠다.


점점 추워지는 가을. 월동준비도 시작해야 한다. 아이들의 작아진 옷들을 처리하고 길어진 다리에 맞는 바지를 찾으러 다다. 작년에 입었던 외투도 아직 잘 맞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나는 여기저기서 옷을 사다 나르기 바쁜데 아이들은 새 옷에 그저 좋다며 나 대신 설레 했다.


그리고 독감주사. 아이들을 데리고 주사를 맞으러 갈 땐 흡사 전쟁터에 나갈 때처럼 비장한 마음을 먹는다. 며칠 전부터 예방주사를 맞으러 가야 한다고 예고하면 아이들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한다. 미션은 울지 않기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께서 웃고 달래며 주사를 놔주셔서 미션에 성공할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용감하게 주사를 맞은 아이들. 의기양양하게 문방구로 걸어가 장난감 칼을 하나씩 사들었다.

아이들은 장난감 칼을 얻었지만 함께 고생한 나에게도 보상이 필요했다. 초콜릿. 초콜릿을 사러 가야겠다.




단것이 필요한 날이 있다. 그런 날엔 어김없이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초콜릿 하나, 두 개 꺼내어 입에 넣으면 단 향이 입안에 퍼져 마음도 한동안 진정되곤 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없듯이 나에게도 초콜릿은 이유 없는 위안이다.


학창 시절엔 집에 가는 길에 있던 편의점에서 자주 초콜릿을 사 먹곤 했다. 편의점에 들어서면 고민도 없이 초콜릿을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았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아빠가 사다 주는 초콜릿 우유를 좋아했다. 아빠는 다 큰 딸이 좋아하는 초콜릿 우유를 잊지도 않고 항상 냉장고에 채워 넣어 주셨다. 아빠 덕분에 매일 아침을 초코향 가득하게 시작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을 위한 초콜릿을 사놓곤 한다. 초콜릿과 초콜릿 과자, 초코 소라빵까지. 아이들도 나를 닮아 초콜릿이 들어간 간식이라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그래도 오늘은 나의 초콜릿을 사리라. 가을이 시작되고 주말에도 남편 없이 홀로 육아를 도맡아 한 나를 위한 초콜릿을 사야 했다. 남편은 주말에도 부대에 나가고 평일엔 대학원에 교육까지 받아야 했다. 일 때문에 바쁜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 남편도 나도 늦은 밤 겨우 얼굴 맞대고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안부만 전한다.

외투는 점점 두꺼워지고 찬바람이 얼굴을 덮치는 요즘. 초콜릿을 입에 넣고 싶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살살 녹여 입안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장난감 칼을 든 아이들과 마트에 가서 초콜릿을 샀다. 한 봉지, 아니 두 봉지를 집어 바구니에 넣었다. 초콜릿은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낱개 포장되어 있는 것으로 골라야 한다. 아이를 하원 시키러 갈 때 한 두 개 까먹고, 하원한 아이의 입에도 하나 넣어 주어야 하니까.


오늘도 아이들과 집을 나서며 초콜릿을 주머니에 한주먹 챙겼다. 아이와 손잡고 초콜릿 하나, 두 개씩 까먹으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발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아이들의 따뜻한 손만큼이나 입속에서 번는 따뜻한 초콜릿. 아이들은 입안 가득 초콜릿을 물고 해맑게 웃어주었다. 초콜릿 하나로 쌀쌀하기만 한 가을을 잠시 덮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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