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저 나만의 상처였다
첫사랑이 바람을 폈다. 내가 아는 여자였다.
다들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문득 ‘그게 진짜 나한테 일어난 일이 맞을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마치 내가 눈으로 본 듯이 생생하던 그때의 일을 떠올리지 못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절대 잊힌 건 아니다. 가끔 잊고 살아갈 뿐이었다. 오히려 불현듯이 찾아오는 기억에 당황스러운 불쾌함에 시달렸다.
어느 날 꿈에 날 괴롭힌 사람들이 나왔다. 꿈에서의 난 용감했고, 삼자대면을 주도했다. 둘을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꿈에서 깨니 그저 무작정 덮어두려 한 나로 돌아왔다.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잠에서 깬 직후의 그 몽롱함이 꿈에서의 나와 현실의 나의 경계를 흐려주었다.
이미 족히 백번은 들어갔던 그녀의 SNS에 접속했다. 메시지를 보냈다. 그 묵힌 시간의 힘으로 아주 덤덤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으며, 아주 상처받았다고.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는 환호했다. 내가 해냈다! 심지어 떨리거나 긴장되는 느낌도 없었다. 내가 피해자인데도 왠지 모르게 그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냥 모르는 척, 없었던 일인 척 넘어가고 싶었다. 그런 내가 영리하다고 위안하면서도 답답했었다. 난 그녀에게 약간의 질책을 했으며, 잘못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고, 불행하라는 말까지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건 정말 축하받을 일이라고.
그리고 나는 이틀간 잠에 들어서도 몇 번을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혹시 답장이 와있을까 봐. '답장에 욕이 담겨있으면 어쩌지, 죄송하다고 하면 뭐라고 하지, 답장이 안 오면 다시 연락을 해야 하나' 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 머리에 그렸다. 그런데 나는 정말 당연한 경우의 수 하나를 그리지 못했다. 그녀의 적당한 자기변명과 조금의 미안함을 서두로 다시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이미 지난 일을 꺼내는 게 조금은 당황스럽다는 그 메시지를 보고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안 하느니만 못한 무기력한 답장을 보냈다.
왜 나는 당황했을까
왜 그냥 ‘시발 너는 쌍년이야 닥쳐’라고 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너의 나쁜 행동을 여기저기 퍼트리겠노라 말로라도 협박하지 못했을까.
그때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내 상처 앞에 ‘이건 누구누구 때문에 생긴 상처’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됐다. 내 상처는 오직 나만의 상처였다. 그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누구도 위로해줄 수 없는 그저 나만의 상처였다. 가해자들을 통해 내 상처를 치료하겠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판타지일 뿐이었다. 일단 그걸 인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