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 남미 탐험 — 갈라파고스, 페루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싫어하면서 살았다. 하다못해 이름까지도. 내 또래가 가진 이름에 비해 다소 올드하다고 느꼈던 이름에 정을 붙이는 게 쉽지 않았다. 남미 여행이 내게 특별했던 건 내가 이름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에서부터 페루까지 여행하는 내내 통성명을 하면 이름이 신기하거나 예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내 이름이 딱히 특별한 이름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인가 그럴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멋쩍게 웃기만 했었다.
나는 남미에서 주로 SUN, 가끔은 MOON이라고 불렸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고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불러주면 돼"하고 알려줄 영어 이름을 정하지 못해서 언제는 sun, 언제는 moon, 또 언제는 luna라고 불러달라 매번 바꿔가며 말하기도 하고 sun이든 moon이든 네가 편한 대로 불러달라 하기도 한다. 어쨌든 모두의 비슷한 반응은 이름이 예쁘다는 말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그거? 이름에 어떻게 sun과 moon을 다 쓸 수 있어? 내가 만난 사람 중 이름이 제일 예뻤던 건 summer였는데 네 이름도 마찬가지로 너무 예뻐. 어떻게 이름이 sun일 수 있지? 한국어로 늘어놓는 게 민망할 정도의 찬사들을 받았다. 리마에서 서핑을 알려주던 Johnny는 몇 번이고 감탄을 늘어놓더니, 안개 걷힌 해변으로 내려오는 햇빛을 가리키면서 Sun! There is a sun in the sky! 하고 말하기도 했다.
리마의 호스텔에서는 매일 저녁 수건을 새로 받아 썼다. 제일 자주 만난 레오는 내가 수건을 받으면서 Gracias!(thank you) 하면 yes, lune. 하고 대답하곤 했다. 레오가 나를 그렇게 불러줄 때마다 왠지 투박하게만 느껴졌던 내 문 씨 성이 꼭 로맨틱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내 이름을 사랑해주던 수많은 친구들이 결국은 나도 내 이름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달과 해를 조합한 그림을 꼭 여기에 있는 타투샵에서 몸에 새기고 싶어서 리마에서의 마지막 날 생애 첫 타투를 했다. 최대한 얇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남미 스타일로 두껍게 된 타투인 데다, 타투를 관리할 제품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했으니 더더욱 두껍게 번져버렸다. 그렇지만 이거대로 남미의 정체성이라 생각해서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이름을 소개하면서 손목을 내밀어 보여주기도 하니까.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의미가 있는 이름이 부럽다는 말까지도 들었으니 말 다했지.
호스텔은 호텔에 비해 비교적 낯선 이와 대화할 가능성이 열려있는 숙소인 만큼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할 일이 많았다. "내 이름 네가 발음하기엔 좀 어려울 거야... 그래도 괜찮아?" 하고 알려주던 내가, 나중에 가서는 "내 이름은 문선영이야. 네가 발음하긴 좀 어렵긴 하지?"하고 말했다. 이 한 끗 차이는 나조차도 뒤늦게 자각할 만큼 사소한 변화였지만 아주 커다란 반향이었다. 반년씩 떠돌았던 여행에 비하면 5주는 아주 짧지만 내 인생을 바꾸기에 적당한 기간이기도 했다. 이 여행 이후로는 어느 그림에나 짝꿍처럼 붙어있는 해와 달이 반가웠고, 해든 달이든 뭐 하나 발견할 때마다 "이건 나야!"하고 우기기도 한다. 나를 이만큼이나 달라지게 한 남미를 사랑하는 건 내게는 불가항력.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