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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May 01. 2019

전형적인 사람에서 벗어나기

 올 초에 머리를 잘랐다.

 그것도 내 삼십 년 넘는 인생에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길이로.

 숏컷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많은 질문들이 나를 따라왔다. 일단 그 모든 질문들은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방문했을 때, 헤어 디자이너의 '왜 자르시려는 거예요?'라는 질문부터 시작된다. 숏컷을 하고 나서는 아주 전형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머리를 자르는 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강력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따위의 것들. 때로는 그 질문들이 조금 피로하기까지 했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그렇게 대단한 의미가 있어야 하고, 내가 아닌 제삼자들의 암묵적인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를 몰랐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내가 숏컷을 하기로 결심한 데는, 어떠한 결정적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숏컷으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이고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으며,  이 궁금증은 경험으로 이행하지 않는 이상 상상 속에서만 끝나는 것들이었다. 결국 나의 숏컷은, 호기심과 오래 고민하기 싫어하는 단순함이 낳은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숏컷으로 나타난 나를 보고,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의 반응은 꽤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못 하는 어린이들의 반응은 조금 더 솔직했다. 재미있는 건, '숏컷하셨네요.'라며 쿨하게 반응하는-그렇다고 잘 어울린다는  말은 아닌- 고학년들과는 달리 학년이 내려갈수록 나를 보고 경악하는 저학년들이 많아졌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대뜸 '선생님 머리 왜 잘랐어요?', '이상해요.', '남자 같아요.', '머리 긴 게 더 예뻐요.' 등의 말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쏟아냈다.


 "선생님이 남자 같아? 어디가?"

 "남자 머리 했잖아요."

 "머리가 짧으면 남자인가?"

 "네, 머리 짧으면 남자예요."

 "아하. 지호는 머리가 길면 점점 여자가 되는구나. 그래서 머리를 짧게 자르는 거였군."

 "아뇨. 저는 남자 맞거든요?!"

 "선생님도 여자 맞는데?!"

 "아니에요!! 머리 짧으면 남자예요!!!"


 나의 여성성을 극렬히 거부(?)하는 이 열 살짜리 꼬마를 보면서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려나가면 그만일 이 10센티 남짓한 단백질이 나의 여성성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눈과 귀를 막고 '머리가 짧으면 남자'라고 외치는 장면을 보니, 사회가 형성한 전형적인 이미지라는 것이 개인의 이성과 논리를 무력화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느꼈다.




 사회가 요구한 틀에 맞춰 살아가는 건 제일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걷는 일이다. 어떤 사회생활을 해도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것은 비슷하겠지만 교사도 이 맥락을 벗어날 수는 없다. 사회에서 정한 교사의 이미지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거기에 대중들은 높은 도덕적 잣대까지 들이댄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교사 한 명을 떠올려보자. 긴 머리에 원피스를 입은, 단아하고 상냥한 성품을 가진 비장애인 여교사가 떠올랐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에서 교사에게 요구하는 전형적인 이미지다. 나의 숏컷은 나라는 전체에 있어 외모라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겠지만 아이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히 거부했다. 이를 위해 국가에서는 사회화의 한 과정으로, 개인이 특정 집단에게 가지는 이미지가 고착화되거나 선입견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다양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좀 모순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교육받는데, 정작 교육기관에는 다양성을 학습할 모델이 적다. 학교에 근무하는 어른들은 외모도 능력도, 생활방식도 대부분 비슷하다. 장애인 선생님도 있어야 하고, 비만인 선생님도 있어야 하고, 혼혈이거나 이북 사투리를 쓰는 선생님, 장발인 남자 선생님도 있어야 전형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존중할 수 있는 법이다.


 현실은 다르다. 아침에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한다. 샛노랗게 염색을 해보고 싶다가도 '그럼 방학 때 하지' 정도로 타협한다. 샛노란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가면 제일 먼저 우리 엄마가 '교장 선생님께서 뭐라고 안 하시니?'라며 붙잡으실 거다. 요즘도 엄마는 출근하는 내 뒤통수에 대고 사내애처럼 하고 다니는 거 아니라며 잔소리를 하시는 분이니. 그러면 나는 엘리베이터가 빨리 올라오기를 바라며 더 결심하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처음부터 교사처럼 태어난 교사는 없다. 타고난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교사로 살아가기 위해 교사의 전형성을 학습하셨을 테다. 태어날 때 다양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시작할지라도 교사라는 틀 안으로 들어서면 비슷한 모습으로 획일화된다. 교단에 선 내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면 혹시 사회가 개인의 종말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숏컷을 하기로 결심한 데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숏컷으로 인해 어떠한 변곡점이 될만한 사건이 생긴 것은 확실하다. 오늘도 나는 나만 아는 소심한 반항을 한다. 숏컷에 맨얼굴을 하고서는 배낭을 대충 둘러메고 출근을 한다. 음악 시간에 음이탈이 나도 뻔뻔하게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전형적인 틀을 완벽하고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보다 불완전하거나 남들과 조금 달라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선생님다운 나보다는 나다운 선생님으로 사는 게 행복하기도 하고.


201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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