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우산을 샀다. 십여 년 만의 일이다.
십여 년간 한 우산을 쓰고 다니며 깜빡 챙기지 않은 적이 두어 번 있었으나, 이날은 도로 찾으러 가지 않았다.
지난 토요일, 선방 입구에 우산을 놓고 왔다. 그걸 알아차린 때는 이미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온 뒤였다. 카드를 찍고 나오기 전, 한 젊은 비구니 스님을 보았다. 삭발한 머리부터 얼굴까지 회청 색조로 파르스름한 그 모습에 눈길이 떼어지지 않았다. 벼린 면도날같이 준엄하고 시리도록 말끔한 낯빛이었다. 크고 시원하게 떠진 눈동자는 내 시선을 비껴나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날마다 되새김질 해온, 이날따라 몇 번이고 솟구쳐 심장을 욱신거리게 한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처음 뵙는, 내게 한 번 눈길이 닿은 적도 없는 그 분께 묻고 싶었다. 어떻게 머리를 깎게 되셨나요? 머리를 깎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이날 나는 처음으로 선방에 늦을 뻔했다. 전에 없이 한 정거장을 깜빡 지나쳤다. 분명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섰는데, 내 귀에 들려온 방송은 다다음역에 도달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믿기지 않아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나타난 역 이름이 내가 틀렸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아 기계의 오류가 아닐까 의심하며 지하철이 멈춰 서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기계가 아니라 나의 오류임이 밝혀졌다. 나는 놀랍고 의아한 마음을 접으며 퍼뜩 내렸다. 플랫폼 맞은편으로 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열차를 기다린 후 한 정거장을 거슬러 다시 내렸다.
선방에 이르렀을 때 어른 스님은 아직 와 계시지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방 뒤편 의자에 가방과 외투를 부려놓고 빈 좌복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당긴 채 다리로는 반가부좌를, 손으로는 '법계정인', 연꽃 모양을 잡으며 화두에 집중했다.
'나는 누구인가.'
이 화두가 슬며시 틀어지며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역을 지나치는 동안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물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내릴 곳을 지나친 기억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내리려고 일어나 준비하고 있던 와중 그랬던 경험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나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릴 곳을 알리는 방송을 듣지 못했다. 그 한 정거장 사이에 불가사의하게도, 나와 지하철, 사람들과 사물들이 통째로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모든 걸 비추던 내 의식이 완전히 꺼졌다. 그리고 그 다음 역에 가까워졌을 때에야 홀연히 켜져 나와 사람들, 지하철 안 풍경이 다시 나타났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나는 있다가도 없는 존재임이 모르는 사이에 드러난 것인가.
내가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 물을수록 나라는 그 이름이 아득해지고 세상이 아득해진다.
저녁 예불까지 마치고 사찰 일주문을 나설 때면 개운하기보다 늘 아쉬웠다. 그 마음이 분신 같은 헌 우산을 놓고 가게 한 것인지 모른다. 나는 우산을 잃어버린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태 소중히 여기던 것을 잃어버린 줄만 알았었는데 도로 되찾은 기분이었다. 우산이나마 사찰에 남아 있었다. 이 사실이 마음을 비로소 놓이게 했다.
새로 산 우산엔 무늬가 점점이 찍혀 있었다. 노란 부리를 다문 작고 하얀 새들이었다. 이날 어른 스님께 '줄탁동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줄'이 아닌 '졸'탁동시였다는 이 한자성어의 두 앞 글자는 모두 '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때를 맞춰 둘이 함께 쪼는 것이다. 왜?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다. 병아리와 어미 닭이 서로 뜻을 합쳐 알 안에서 쪼고 밖에서 쫀다. 병아리는 제 머리 위를 막은 알 천장을 부리로 콕콕 쪼고, 이 소리를 굽어살피며 어미 닭은 알 지붕을 적시에 찍어내린다. 마침내 알 껍질이 산산이 부서져내리고 안팎이 모두 허물어진 자리에 병아리는 서 있다. 놀랍게도 나의 관점이 달라져 있다. 원래 줄탁동시, 하면 깨어나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안팎이 허물어진 자리'에 마음이 간다. 본래 없던 안팎을 세운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안팎의 안에 스스로를 가둔 이는 누구인가. 화두가 또다시 고유화된다.
우산의 새들은 안팎으로부터 놓여 난 새들이었다. 줄탁동시에 대한 예고를 나는 우산 속에서 기어이 읽어냈다. 그것은 내 다짐과도 같았다. 사실 우산을 사러 갔을 적엔 먼젓번 우산처럼 무늬 없는 검은색을 바랐다. 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것이 없었고, 새들이 프린팅된 이 우산만 그래도 바탕이 검은색이어서 안정감을 주었다. 한편으론 '나 완전히 새 됐어'란 표현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 생각을 붙잡지 않고 흘려보냈고, 전환시켰다.
관점에 따라 똑같은 새 무늬가 다르게 읽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같은 세상일까.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사는 듯 보이지만, 이 시공간을 활용하고 어지럽히고 정돈하는 모습들은 같지가 않다.
얼마 전 아침, 식탁 의자의 등받이 조각을 보며,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이 조각이 무슨 무늬로 보여?"
나는 그 순간 리라의 현을 떠올리고 있었다. 액자처럼 가장자리에 테를 두른 의자의 등받이엔 빈 공간이 많았다. 여백을 안으로 들인 등받이 중앙엔 서로 대칭을 이룬 곡선과 그 안의 직선 네 개가 어우러져 마치 하프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당시 내 눈에 특별히 다가온 것은 네 개의 직선이었다. 나는 이 직선이 손가락으로 퉁기면 소리로 울려퍼질 현으로 여겨졌다. 너무 팽팽해도 느슨해도 소리가 안 나는 심금.
"크레파스 아닐까."
엄마의 대답이었다. 나는 함박 웃었다. 우리는 이토록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 한 지붕 아래서도 세 사람이 산다면, 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천 개의 강물에는 천 개의 달이 뜨고, 2500여년 전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올려 보이신 순간 가섭이 홀로 지었던 미소의 의미를 나는 알 것 같다. 당시 부처님 앞에는 적어도 1200명의 비구들이 앉아 있었다. 즉, 하나의 연꽃이 그것을 마주본 1200 비구들의 마음 속에서 서로 다른 1200 연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가섭은 자기만이 볼 수 있는 연꽃 하나를 그 순간 보고 알았고 자신이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세계의 주인임을 오롯이 체험했다.
초록은 동색이 아니다. 나는 며칠 전 봄날의 숲에서 온갖 색조와 농도의 다채로운 초록을 목격했다. 내 눈에 비친 초록은 가득한 숨결로, 점묘화로 펼쳐지며 다음의 시로 씌어졌다.
녹색 진동
초록도 다 같은 초록은 아니다
바람에 날아오르는 잎새들
골판지 같은 잎맥 둥글게 뻗치며
가벼이 부풀어오른다
나무들 사이사이
숨길이 펼쳐져 있다
숲에는 숨길이 뚫려 있다
추락하듯 활강하는 새여
둥치들 사이로 무색이 환하다
무색을 숨 쉬며 다채로운 초록이 비상한다
초록은 멈추지 않는다
는질는질 꼬리 잘린 숲의 주인이 울며 지나가고
날갯짓하는 종소리
나무가 솟았다 한들
공간이 막힌 걸까
생각이 가득한들
마음이 가린걸까
서로 다른 bpm으로 초록이 지나간다
잠시 일터를 나와 숲길을 걸으며 녹색으로 우거진 자연의 색조와 맑고 높다랗게 울려퍼지는 새 소리에 둘러싸이면 숨통이 트인다. 바로 이곳이 내 세상이구나, 싶다. 색색깔로 짙어지면서도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깨끗한 색조들 속에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자줏빛 단풍잎과 그 사이로 아스라한 석양빛에 매료돼 휴대폰 카메라로 초점을 맞추고 최대한 생생하게 포착하는 일에서 희열을 느낀다. 무엇보다 내 삶을 예술로 포착하는 일, 일상의 시공간 속에서든 여행지에서든 내가 포착한 사물과 느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산문으로, 시로, 소설로 진실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는 진심과 마주한다. 나의 본성은 새롭게 발견하고 그려내는 일에서 행복을 찾는다.
나는 누구인가, 다시 뱉어본다. 들이쉬어지는 숨결이 이 세상이 나를 호흡하게 하는 인큐베이터구나, 미소짓게 한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건 없다. 나를 압박하던 생각과 감정은 어느새 가라앉았다.
나는 누구인가, 다시 한 번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이 호흡이 증명한다. 세상은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충분히 비어있다. 아니, 공기로 가득차 있다. 비어있음이 곧 가득함이다. 내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다. 비어있는 속에서 다채롭게 작용한다.
숱한 봄꽃, 나무들 사이의 빈 공간을 주시하는 요즘이다. 이 모든 크고 작은 색색깔의 꽃나무들을 떠받치고 있는 건 보이지 않게 가득한 공기들이었다. 더욱이 눈앞에 무수히 피고 지는 각양각색 잎새들도 알고 보면 무색무취 공기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던가. 나를 태어나게 한 마음도 이 공기를 닮아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숲, 세상과 함께 태어났다. 때로 이 모든 비춰지고 느껴지는 정경들이, 그리고 나를 에워싼 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들이 간혹 빽빽하고 짙어 보일지언정, 그 밀도와 색채는 내게서 투사된 것이겠구나, 어렴풋 감지한다.
나는 누구인가, 화두의 요건을 되짚어본다. 첫 번째 대신심, 나는 깨달은 완전한 사람이다. 다음으로, 대분심, 나는 완전히 깨달은 사람인데, 그것을 왜 자각하지 못하는가. 참으로 억울하고 원통하다. 마지막 대의심. 도대체 왜, 내가 이러한가. 나는 본래 누구인가.
화두, 나를 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깨뜨리는 말.
숲길을 걷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콕콕콕, 둥치를 쪼는 오색 딱따구리를 종종 발견한다. 화두를 파고든다는 건 부리로 콕콕, 나를 뒤덮은 천장을 쪼는 일이다. 이때 알 바깥 어미새 부리 같은 선지식의 한마디가 같이 쪼아준다면, 줄탁동시, 비로소 알에서 깨어난다.
나는 길 위에 있다. 이 길은 뜻하지 않게도 갈림길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 위 천장이 무겁게 여겨진다. 나는 깨나고 싶다. 나는 왜 아직 깨나지 못하고 있는가. 경칩 전, 템플 스테이 날 묵은 방 천장엔 격자살이 교차하는 장지 문짝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 문은 내가 본, 유일하게 막혀 있지 않은 천장이었다. 동시에 열어젖힘을 함축한 시이자 화두, 깨어남을 일깨운 상징이었다.
숲에 가면 사방에서 우짖는 새들이 나를 깨어나라 재촉한다. 어느 저녁 귀로에 올려다본 하늘에는 초승달과 별 하나가 또렷이 밝았다. 나의 염원처럼 가로등보다도 드높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다. 가로등도, 달과 별도 내 마음의 무늬라는 것을. 도대체 내가 만든 세상 속에서 나는 왜 아직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는가. 홀로 숨 쉬고 홀로 바라볼 뿐인데, 왜 번번이 스스로 얽매이고 도망치길 반복하고 있나.
갈림길 아닌 순례길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하염없이 걷고 싶다. 어렸을 적 나는 유난히 걷는 것을 좋아했다. 길은 가도가도 열려 있었고, 내가 걷는 땅은 내 발길을 붙들지 않았다. 그 길이 나를 부른다. 바람과 숲과 하늘과 허공이 가득한, 오롯이 들이쉬고 내뱉는 숨길 가운데 자유로이 멈추고 거닐며 나아가는 삶.
깨어난다면, 깨어난다면 그리 살 수 있겠지.
날마다 오늘을 맞으며 단 한번도 진정으로 깨난 일이 없다. 매일의 아침이 나는 괴로웠다. 다만, 참선을 시작한 후로는 괴로움을 재빨리 호흡으로 돌릴 줄 알게 됐다. 그래도 세상이 나에게 아직 숨쉬기를 허락하는구나. 더 살아가라 하는구나. 지금도 나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계속해서 호흡한다.
갈림길 아닌 숨길이 펼쳐지는구나. 그래, 숨길이다.
이 숨을 들이쉬고 내쉼을 아는 나를 나는 목전에 두고 애타게 찾고 있다.
어느 길목에서 어떻게 만날 것인지...
그 순간 나는 또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한없는 기대를 담아, 더 큰 그리움을 담아, 다시, 또다시, 되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펼친 우산이 탁, 빗방울을 퉁겨낸다.
내 머리 위로 비를 긋고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는 전철역으로 내려간다.
갈아 탄 지하철이 지상으로 이동한다.
지하철 유리 너머 빈 선로의 레일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지금 오는 중인
열차의 속도를 그려보이고
나는
몸집에 든 채
몸집 바깥의 하나 하나 몸집들에 색깔과 소리, 생각과 느낌들을 쏟아 붓는다.
나는 너를 보며 나를 본다
나는 너를 들으며 나를 듣는다
이 의식의 와중 내릴 문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홀연,
다다음 역을 알리는 방송을 듣는다
이전 역에서 다음 역으로 가는 사이
꺼졌다가 켜진
나는 누구인가
이 명백한 암전의 환기는 몸집과 의식 이전에서 비롯된 메아리
나는 그 이름 없는 이전 역을 줄곧 지나쳐왔다
돌아가는 길은
머리를 깎아야지
되뇌다 깜빡 우산만 놓고 왔네
숨길로 가자
오늘도 세상이 나를 숨 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