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 철 농번기에 김매기가 수고롭습니다.'
나는 스승에게 말하듯 되뇌고 있었다. 여름은 참선參禪의 계절이다. 여름 숲은 꿈틀거리는 생명들로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다. 귓가엔 쉬이 다스려지지 않는 번뇌처럼 앵앵거리는 날파리가 따라붙고, 마르고 진 흙길로는 다리보다 육중한 몸뚱이를 인 벌레들이 우글우글 바삐 움직인다. 날개 자락이 단청 무늬 같이 청아한 산비둘기 몸뚱이도 가는 두 다리로 지탱하기 퍽 고단해보이고, 나는 눈가가 질퍽하니 미안해져 그만 물러나와야지 싶다. 다행히 내게는 화두가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줄여서 '이뭣고'. 나는 주중엔 틈틈이, 주말엔 사찰에서 오롯이, 화두를 든다.
2주 전, 스승과 차담을 나눴다. 나는 5월 초까지 참선입문과정을 배운 어른 스님을 이제 마음으로나마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한 시간 참선을 한 뒤 법복을 입은 채 스승이 계시는 사무실로 내려갔다. 스승은 확 깬 시선으로 사무실 바깥에 선 나를 한 번 깊숙이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환히 웃으며 부르셨다. 나는 법복을 입은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맞은편에 앉아 계신 스승의 두 눈을 똑바로 봤다.
내 앞에 놓인 찻잔은 작고 희었다. 원뿔 조각을 뒤집어 놓은 듯 밑면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모양의 찻잔이었다. 첫눈에 예리해 보였다. 나는 슬며시 찻잔에서 눈을 떼 스승의 두 눈을 마주봤다.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는 눈이었다. 명징한 빛을 띠었고, 웃음이 만면에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표정. 강의 들을 적 뵙던 것보다 사뭇 친근하게 와 닿는 모습이었다. 더 젊고 편안한 인상이셨다. 그러고 보니 강의할 때나 가사를 걸치고 법문하실 때와는 달리 금테가 아닌 검정 뿔테 안경을 끼고 계셨다. 스승은 웃음기가 감도는 담담한 어조로 요즘 내 상태에 대해 물었다.
"스님께 질문을 드리고 나니 이상하게 그 소리들이 사라졌습니다."
"정리가 되었나 보네."
스승은 흡족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간 두개골에 불어닥쳐 두피를 누르던 부드럽고 강렬한 기운이며 질문을 보내드리고 난 뒤 식탁 너머로 본 전에 없이 드넓게 깔린 불가사의하고 아름다운 놀의 퇴적층이 떠올랐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숱한 생각 소리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생각 소리. 말 그대로 소리처럼 울려퍼지는 생각을 일러 내가 붙인 이름이다. 참선을 시작한 경칩 이후 나는 그 동안 내가 원해서 붙잡은 것들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가, 처음으로 되묻게 되었다. 여태까지의 나 자신이 갈라지고 쪼개지는 경험이었다. 나는 견딜 수 없어 어리석게도 다 놔버리고 달아날 궁리를 했었다. 음력 4월 초파일이 막 지나간 무렵이었다. 스승께서 친절히 안부를 물으시며 언제든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문의하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오셨다. 나는 놀라움과 죄송함이 뒤섞인 마음에 쉬이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흘이 지난 일요일 저녁,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결행하였다. 지난번 불미스런 모습을 보인 데 대한 자초지종과 죄송한 마음을 먼저 밝힌 후 현재 참선을 하며 맞닥뜨린 경계에 대한 질문을 한글 파일에 담아 카톡으로 보내드렸다.
"방하착, 한다고 하지. 방하착, 이라고 하면 흔히 욕심을 내려놓는다, 화를 내려놓는다, 라고들 하는데, 그걸 어디다 내려놓는지 알면 좋은데......."
나는 '어디다', 이 말을 곱씹었다. 스승은 찻잎을 오른 손끝에 잡고 그 양과 우리는 시간과 농도를 가늠하고 계셨다. 얼굴보다 큰 손이었다. 이 손에 다른 손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던 적이 있었다. 불안하고 들뜬 마음으로 선방에 도착한 날이었다. 4월의 첫 날이었다. 나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초조하게 열차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마침 그날은 오랜만에 도반과도 만나기로 약속이 돼있었다. 템플스테이하던 밤 우리가 함께 창 너머로 바라본 사리탑 앞에서였다. 나는 어서 열차에 몸을 싣고 어제까지의 일상에서 벗어나 그곳에 가 있고 싶었다. 그때 중학교 고학년이나 고등학교 저학년 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을 데리고 청년인지 아저씨인지 모호한 인상의 안경 쓴 사람이 다가왔다. 갑자기 다가온 그 사람은 대뜸 양쪽 열차 가운데 어느 쪽이 서울로 나가는 것인지 물었다. 목욕탕에서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발성이 강의하는 톤이었다. 당시 신입 교육과 시강을 거듭하던 나는 어쩐지 시험을 치르는 듯해 다소 긴장을 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을 주고 무뚝뚝한 어조로 필요 이상 자세히 설명했다. 내 말을 듣던 그 사람의 입가에서 순간 야릇한 웃음이 번졌다. 때마침 열차의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퍼졌다. 낯선 두 사람은 어느새 승강장 반대편으로 작아져 있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하며 스크린 도어가 열리자마자 얼른 올라탔다. 빈 좌석에 앉아 나는 누구인가, 화두를 드는 사이 사찰이 있는 역에 다다랐다. 도망치듯 열차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빠져나와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약속대로 절의 사리탑에서 도반을 만났다. 우리는 선방까지 같이 들어갔는데, 도반과 나란히 좌복에 앉아 있으려니 전에 없이 마음이 들떴다. 여름 한복판에 이른 것처럼 날씨는 무더웠다.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도 카키색 잠바를 벗지 않았다. 안에 입은 후드티가 하필 검은색이어서 참선하기엔 너무 어두운 복장이 아닌가 저어된 까닭이다. 이런 지엽적인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스승께서 들어오셨고 4회차 강의가 시작되었다.
"대사일번大死一番 절후소생絶後蘇生."
스승께서 화이트 보드에 쓴 한자를 소리내어 읊으셨다. '크게 한번 죽어야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
여기서 크게 한번 죽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마음을 완전히 고쳐먹고 욕심을 발원으로 전환한다는 뜻이다. 당시 변화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고 있던 나는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는 편이 쉽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이 의미심장한 변화의 실천과 관련하여 연기법과 중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연기법의 '연기'는 조건에 해당하는 '연'과 일어날 '기'가 합쳐진 표현으로 '인연생기'의 준말이다. '인연에 의하여 일어난다.' 바로 무언가에 의지해 새로운 것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스승께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태셨다. 인연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갖는 오해가 있다. 보통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 서로 인연인가 보다, 생각하는데 실은 인연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만남에서 뭔가 새로운 결과가 나타나야 진정한 인연이다. 가령 적극적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서로 노력할 때, '참 좋은 인연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 인연을 맺어나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기분에 끌려다니지 않아야 한다. 한순간의 기분 때문에 상대를 언짢게 대하면 그로부터 나쁜 인연이 비롯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장 적절한 지점이 무언지 찾는 일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부처님의 실제 수행법이 바로 중도다. 이 중도를 익혀나가려면 무엇보다 정견이 바로 서야 한다. 정견, 그러니까 바른 견해는 모든 행위의 시작점이다. 대상과 처음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생각, 즉 내 욕심과 감각, 이익이 중심이 된 생각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생각이 무엇일까 찾아내는 일. 여기서 핵심은 바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에 있어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정견을 통해 나를 내세우지 않고 바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참선은 이 정견을 돕는 수행법이다.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감각에 끌려가지 않도록 붙잡는 것이 참선의 기본인 까닭이다.
강의 후 15분간 우리는 다리를 맺고 양손을 연꽃 모양으로 모은 채 실참에 들어갔다. 나는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끌려가지 않으려 배의 돛대에 자신을 단단히 묶도록 한 오딧세우스처럼 화두에 집중했다.
이윽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불교대학생인 도반은 자기 강의를 들으러 내게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나는 열린 격자살문 밖으로 나가 잠시 포행을 하고 들어와 앉았다. 스승께서 왼편 좌복과 오른편 좌복 사이 오솔길같이 빈 곳을 가만가만 걷고 계셨다.
"덥지 않으십니까."
어느 틈에 슬그머니 다가오신 스승께서 넌지시 내게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급히 왼손을 들어 올리고 입을 가렸다. 스승의 은근한 어조에 맞춰 선담을 내놓아야 할 듯 싶었는데 쑥스럽고 이상야릇하게 기분이 들떠,
"저는 더위 속에서도 서늘한 기운을 느낍니다"
간신히 내뱉고 말았다. 스승의 표정이 미심쩍게 굳어졌다.
수업이 다시 시작되고, 방 앞쪽의 화이트 보드 근처로 돌아간 스승이 펼친 왼 손등을 들어 올리셨을 때였다. 내 눈길이 그 손등에 닿았다. 얼굴보다 훨씬 커다란 손이었다. 나도 모르게 영화 <대부> 속 마피아의 보스 알파치노가 홀로 근심에 싸인 얼굴로 방을 서성이다 입가로 들어올린 커다란 손바닥이 겹쳐 보였다. 얼굴을 덮고도 남을 만치 커다란 그 손은 가족 중심의 조직을 이끄는 고독한 우두머리의 존재감과 더불어 동물의 세계와 다르지 않은 그 이면을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스승은 대번에 내 눈의 미혹을 알아차리시고 날카로이 표변하셨다. 일종의 경계였을까. 그 손이 왜 순간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았을까. 이왕 덮씌일 거 커다란 연잎같이 보였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왜곡되어버린 안식眼識에 놀라고 낭패감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수업을 마칠 즈음 수행본부 팀장님이 앞으로 나오셔서 오늘 반장하고 싶은 사람 지원을 받는다고 알려왔다. 이 말을 들은 스승께서 우리 반의 젊고 반듯한 부부 보살님과 거사님을 눈으로 가리켜보이더니,
"부부를 시켜!"
일갈하시고는 문을 나가셨다.
달이 바뀌고, 마지막 10회차 강의 날 저녁 일대일 면담이 있었다. 면담을 통해 무無, 시삼마是甚麼(이뭣고), 마삼근麻三斤, 세 가지 중 그 사람에게 가장 맞는 화두를 주신다 하셨다. 무자無字 화두의 경우, 평소 걱정, 근심, 화가 많은 사람에게 적절하다. 없을 무자에 이것들을 넣으면 마음을 돌이키고 근본적인 것을 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화가 났을 때 이 화가 어디서 왔을까, 돌이켜 생각하여 벗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 이뭣고 화두는 이것?, 무엇?, 하며 현상을 바로보게 한다. 즉, 눈앞의 현상에 따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자리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나는 어쩐지 이 화두를 받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물론 가봐야 알 일이지만, 이미 예정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마지막 화두는 마삼근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 즉 외부환경을 자신보다 더 크게 생각하여 스스로에 대해 너무 어쩔 줄 몰라할 때 들면 좋은 화두다. 마가 삼근이면 부처님도 옷 한 벌 해입는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외부로 흩어진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려 스스로를 챙기고 돌이켜 볼 수 있도록 이끈다.
일전에 안식이 혼미해져 불미스런 꼴을 보인 바 있는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팀장님의 안내를 받아 선방이 있는 건물을 빠져나가 그 맞은편 교육국 사무실로 향할 때까지 얼떨떨하였다. 스승과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 앞 대기 의자에 소리 죽여 앉아 나란히 순번을 기다리던 옆 사람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잔뜩 구름 껴 무거운 기분의 나와는 달리 화사하게 칠한 눈과 입이 뒤집힌 무지개마냥 말려 올라간 표정. ‘이 친구는 상담이 순조롭겠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마침내 차례가 되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적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보지 않고도 책상 맞은편에 앉아 계신 스승의 가늘게 뜬 눈에서 번뜩이는 예리한 빛이 느껴졌다. 나는 예각으로 꽂히는 그 눈빛을 애써 모른 척하며 스승의 나직하고 미묘하게 울리는 질문을 들었다.
"월륜행? 다른 절에서 받았어요?"
피할 길 없는 첫 번째 화살이 날아들었다.
"아니요. 여기서 받았습니다."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기본교육과정 때 분명 신도들 이름만 보고 법명을 지으셨단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났다. 나는 과분한 이름을 받았구나, 쓰디쓴 감정을 머금고 눈길을 떨구었다.
나는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았다. 어떻게 내가 이 흔치 않고 과분한 법명을 받게 되었는지. 스승이 갓 불자가 된 이들의 법명을 지으실 무렵 나는 단편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바짝 몰입한 상태였고, 팽팽히 집중된 심파가 마침 내 이름을 짓던 스승의 손에 닿아 양자역학적 영향을 주고받았을지 모른다. 더욱이 소설 마디마디엔 지난 여름의 개기월식과 내 생의 속살을 가리켜보이는 달의 은유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이 단편이 실린 첫 책을 스승께 전할까도 싶었지만 삼갔다.
"참선을 직접 해보시니 어떻습니까."
나는 비참한 심정으로 입을 떼어 여태까지 내가 원하던 모든 일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노력이 작위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노라 누군가 입력해 놓은 듯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묘법 연화경에 보면 상불경 보살님께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이 부처님입니다' 말씀하시잖아요. 이 말씀이 맞아요."
나는 이렇게 던지고는, 한 터럭 부끄러움도 달고 있지 않은 스승의 두 눈을 마주보며 약간 목멘 소리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스님도, 사람들도 모두 제게 인식된 스님이고 사람들이에요.” 하고 내처 말해버렸다. 마음과는 다르게 내뱉어진 그 말에 내가 더 놀랐지만 애끓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스승께서는 반쯤은 타이르고 반쯤은 꾸짖는 어조로,
"그렇게 끼워맞추지 말고,"
하고는 애타는 눈빛으로 주시하셨다. 그때 처음 스승의 눈을 똑바로 보았는데, 안경을 벗은 채였다. 나는 주머니에 고이 감춰둔, 작은 보석 같은 사금파리를 빼앗긴 아이마냥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차피 이럴 거 관계에 휩쓸리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낭패감과 수치심에 휩싸여 뇌까렸고, 급기야 처음부터 끝까지 전 혼자일 거예요!, 하고 스스로를 못 박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보살님, 주변 사람들한테 생각이 많다는 소리 자주 듣지요?"
사뭇 부드러운 어조셨다. 나는 네, 순순히 대답하고 안경을 끼지 않은 스승의 두 눈을 응시하였다.
음력 4월 초하루, 빗방울이 듣던 날이었다. 나는 예상대로 '시삼마(이뭣고)'가 써붙여진 금빛 화두첩과 함께 스승께서 속표지에 손수 내 이름과 '日日是好日일일시호일', 그리고 스승의 법명을 발랄한 필체로 적어넣으신 <간화선 입문> 책을 받아들고 일어섰다.
그 후로 스승과의 대면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는 준비해둔 말을 모조리 잊었다. 전기 주전자가 생생한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뜨고 스승의 말씀에 귀 기울였다.
"서랍정리를 착착, 잘하지. 선사들을 보면..."
일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았던 날들, 마구 뒤엉켜 있던 마음과 조금씩 정리가 되어가고 있는 이 무렵의 오늘을 새삼 떠올리며 스승이 따라주는 초록 물이 또르륵,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문득 호기심이 일어 말했다.
"그런데 방금 참선을 잠깐 해보니 벼린 듯한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일순 놀랍게도 스승의 두 눈빛이 흔들렸다. 가슴 찢어지는 연민과 불안이 한데 뒤섞인 표정. 수업 중 스스로에 대해 '마음이 여려서', 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표정과 눈빛을 바로한 스승이 자상하면서도 자못 분명한 어조로 물으셨다.
"예리한 감각이 느껴진다는 거지?"
"네."
한 모금 정도의 초록이었다. 나는 스승의 움직임을 따라 찻잔을 손에 들고 조금 맛보았다. 생각보다 뜨겁고 진한, 녹색 가시처럼 뾰족한 맛이었다. 이 뾰족한 맛은 그윽한 여운을 남기며 시나브로 녹아들었다. 생각을 일일이 베려 하지 말고 화두라는 지혜 보검을 붙잡을 것을 당부하시는 스승의 음성이 들렸다. 스승은 찻잔을 들고 마저 비우셨다. 나는 약간 주저하다 낭떠러지에서 한 발짝 내닫는 심정으로 돌아볼 것 없이 나머지 모금을 삼켰다. 차 맛을 거론 않는 제자가 의아하진 않으신가. 사뭇 살피는 표정이 굳었다 풀리는데, 스승은 곧 제자의 하안거 정진을 떠올리고 그 정확한 때를 물으신다.
"방선放禪이 몇 분이지."
"30분입니다."
"입선入禪은 몇 분이지."
"10분입니다."
나는 매시 십 분이 입선이라고 또렷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내게는 이 문답의 순간이 선禪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시간을 묻고 답하는 매 순간마다 서로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봤다.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치 검과 검처럼 맞부딪는 순간, 묘하게도 시선은 아득하게 풀어지며 보이지 않게 녹아드는 듯했다. 차 한 모금이 찌르듯 와 닿고는 부드러이 스며들듯. 대신 시선과 맛이 녹아들고 사라진 그 자리가 환하게 펼쳐져 나를 비추고 있다.
방송국 드라마 소품으로 쓰이는 맥주병은 유리가 아닌 설탕으로 만들어진다. 이 가짜 맥주병이 바닷물에 가라앉아 병 밖으로 넘쳐 흐르는 물을 잠시 머금었다 설탕이 녹아 허물어지며 바다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찰나였다.
"걱정했는데 보니까 좋네."
사무실 책상 밖으로 나와 정진하러 가는 제자를 배웅하며 스승이 말씀하셨다. 흐르는 미소를 그대로 머금은 눈길이었다.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어린애처럼 웃음이 터져 나와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마저 웃는다.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질문해."
나는 낮은 목소리로 답하고 뒤돌아섰다 무엇이 그리 아쉽고 그리운지 이내 발길을 멈춰 도로 뒤돌아 힘을 내어 또렷한 목소리로,
“질문이 생기면 또 여쭤보겠습니다.”
다잡듯 말한다. 스승은 지그시 고개를 당기고는 미소 띤 얼굴로 잠시 서 계시다, 다시 눈동자를 부딪쳐 그 눈을 떼지 않고 너그러이 응답하셨다.
"응, 또 물어봐."
나는 비로소 사무실 밖으로 걷는다. 칸막이 책상에 앉은 직원들의 묵묵하고 웃음기 밴 얼굴에 소리 내어 감사를 전하고 문을 나온다. 선원이 있는 꼭대기 층까지 선걸음에 오른다. 가득히 물결이 차올랐다. 그 분의 말씀보다 크고 단단한 눈빛, 묘하게 나긋한 각도로 휘던 고갯짓, 찻잎을 가늠하던 묵직하고 익은 손놀림, 내 불안한 물음에 뜻밖에 순간적으로 떨리던 눈동자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입선과 방선의 정확한 때를 물을 적 깜빡임 없이 보던 눈길과 가감 없는 어조에 나 또한 스승처럼, 이제 막 깨난 어린 새와 같이 눈 떠 대답했던 일, 이 모두가 선담이었구나, 싶었다.
다시 좌복 위에 앉아 면벽을 하고 이것은 무엇인가, 이뭣고, 화두를 들었다. 화두가 처음으로 보이는 기분이다. 물이 물고기를 비추듯, 숲 길에서 마주친 까치가 문득 고개 돌려 비추어보듯.
가감없는 그 눈길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것이다.
본지풍광本地風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