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의 여름

문득 후지이 이츠키와 후지이 이츠키가

by 수연


숲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저편에서 후지이 이츠키를 닮은 소년을 마주쳤다. 소년은 170cm가 넘는 키에 약간 창백하고 야윈 우윳빛 두 뺨을 하고 있었다. 이마로 살며시 내려온 머리칼 아래 서걱이는 눈의 표정이 일본 영화 <러브 레터> 속 후지이 이츠키를 떠올리게 했다. 교실 창가에 기대어 바람에 천천히 휘날리던 커튼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책을 펼쳐 든 후지이 이츠키. 동명의 같은 반 소녀 후지이 이츠키의 눈에 비친 소년 후지이 이츠키의 첫인상이다. 내가 스무 살 적 본 영화였다. 잔잔하고 그리운 ost가 추억이 되어 되울렸다.


뒷덜미에 닿는 햇빛이 이제는 뜨겁다. 온전히 추억하기에 여름의 태양빛은 버겁다. 서둘러 그늘을 찾다 오른편에서 두 후지이 이츠키가 서로 엇갈려 드나들 것만 같은 자전거 정류소로 가 멈춰 선다. 문득 되살아난 이름이 같은 소녀와 소년의 기억을 좀 더 더듬고 싶은 마음에, 더 나아가 기록하고 싶은 열망에, 그리고 그 이전에 생각나는 눈길이 있어 이대로 스쳐지나고 싶지 않았다.


그 눈길은 선禪이었다. 너와 나 혹은 여와 남, 그리고 스승과 제자이기 이전에 같은 이름을 지니고 있어 누군가 그 이름을 부르면 단박에 고개 돌려 동시에 대답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살면서 이런 눈길을 마주한 적은 처음이다. 아무런 판단과 사심이 없는, 가감없는 마음을 나는 그 눈길에서 보았다.

어쩌면 아이였을 적 또 다른 아이에게서 마주한 적이 있을 눈빛. 안녕, 하고 부르면 안녕, 하고 화답하는, 그리고 하교할 적 내일 봐, 하면 내일 봐, 하고 똑같이 말하며 웃을 때의 마음.

어른에게서 이런 눈빛을 마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며칠 후, 나는 속가의 제자가 스승의 설법을 모아 간행했다는 고봉 화상 <선요禪要>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눈동자를 부딪쳐 눈을 멀게 하면

-144쪽

맥락을 좀 더 드러내 보이자면 이렇다.


(...) 얼굴을 보고 근기에 맞게 가르치고[提接} 배우는 납자衲子는 선지식의 얼굴을 보고 간파해야 한다. 문득 눈동자를 부딪쳐 눈을 멀게 하면 무른 진흙 속에 가시가 들어 있음을 비추어 돌아볼 것이다.


너와 내가 만나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순간 그 얼굴은 보이지 않게 된다. 문득 이목구비가 안개처럼 풀리고 아련해지며 마주 비춰오는 마음, 그리고 마주 비추는 의식만 또렷또렷 살아날 때. 이 비추고 비춰오는 마음은 다른 것일까. 서로 뚝 떨어져 있는 것일까.

나는 그 눈에 깃들고 동시에 그 눈 밖으로 가득 차 펼쳐진 생생하고 말없는 기운을 응시하였다.

마찬가지로 내 눈에 깃들고 동시에 내 눈 밖으로 가득 차 펼쳐진 말없이 생생한 기운을 그 눈도 바라봤다.




"장사가 안 돼, 장사가 안 돼."

타령을 하며 짧게 구불거리는 까만 염색 머리에 인조견으로 된 여름 꽃바지 차림의 아주머니가 친구인지 동료인지 두 아주머니와 나란히 지나간다.

나는 글감을 줍는다

그 모든 의무의 뙤약볕에서 벗어나 응달에 서서 스쳐가는 것들을 붙잡아 기록한다.

지구의 회전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하고 싶었다.

스치는 풍경이 조금이라도 또렷이 보이도록.

그러다 손가락을 떼고 발도 떼어 가던 길을 마저 간다. 어느새 새로 깔린 보도블록 위의 하얀 실리콘 모래를 밟으며 도서관 너머 숲길로 파고든다.

비 온 뒤라 땅은 단단하고 질퍽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나는 붉고 단단한 쪽으로만 사뿐사뿐 내딛었다. 이윽고 복판에 키 큰 나무가 심겨져 두 갈래로 나뉜 길목에 이르렀다. 그 사잇길은 나무 왼편이고 오른편이고 닿자마자 발이 움푹 빠질 듯한 진흙투성이였다. 그나마 오른쪽으로 불거져 나온 뿌리 가까이는 디딜만 했다. 내가 둥치로 몸을 바짝 기울인 채 뿌리를 넘으려 할 때였다. 젊은 남녀가 앞뒤로 다가와 섰다. 길고 검은 생머리의 여자는 남색 바탕에 아기자기한 꽃무늬가 흐드러진 긴 원피스 차림이었다. 아가씨, 라고 부르면 딱 어울릴 모습이었는데, 뒤에서 기웃 살피며 따라오는 남자의 온화하면서도 사려 깊은 표정을 보니 부부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여자의 표정은 밝았다.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선뜻 발길을 뒤로 물렸다. 내가 약간 멋쩍은 미소로 인사하며 뿌리를 넘으려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여자의 손에 쥔 목줄을 따라 낯익은 개의 모습이 비쳐든다.

"얘 빠삐용 아니에요?!"


"아니, 얜 믹스예요. 닮아가지고..."

"귀가..."


나는 두 손을 머리 위로 가져가 나비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여자는 살포시 동의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와 나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뿌리를 넘어갔다. 약간 수줍게 웃어보이며 여자는 내 옆을 지나 개와 남자를 데리고 갔다. 마치 여행지에서 같은 여행자와 잠시 대화를 나눈 듯했다. 산뜻한 기쁨이 가슴을 채웠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또 새를 포착하고 싶어졌다.

웬일인지 마음을 열어준 새가 있어 횃대 같은 긴 나뭇가지에 앉은 까치의 모습을 찍었다.

또 날개 자락의 단청 무늬 고운 회청색 산비둘기를 눈으로 쫓다 목을 구부리고 수로에서 물 마시는 모습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해 셔터를 톡, 톡 되풀이하였으나 헛손질.

문득 가까이 걷는 녀석들을 찍으려다 그만두고,

그래, 너희들이 왜 새겠어?!

혼잣말하며 지나왔다.


지나가고 지나오는 풍경들

작은 숲 둘레길 복판 높은 소나무 사잇길로 접어든다.

소나무 오른편 경사가 가파른 가장자리로 부러 거닐다 기우뚱, 해버리는 찰나에 어질머리를 느끼며

너 왜 스릴을 즐기니

자문한다.

어느덧 세 바퀴째,

커다랗고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의 마음씨에 데일까 손바닥으로 끈적해진 뒷덜미를 감싼다.

숲 어귀 무성한 초록이 파도치는데

맴맴,

여름이 가시 돋쳐 부르는 소리

가시 돋친 땡볕 속의 귀로

문득

후지이 이츠키와 후지이 이츠키가

나란히 대답하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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