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도 좋고 나빠도 좋다고?!
2주 전 토요일, 내 첫 도반에게 한 가지 질문을 받았다. 나를 위해 부러 일정을 하루 앞당겨 낙산사에 선뜻 짝이 되어 동행해준 고마운 도반이었다. MZ세대 끝자락인 나보다 열 살쯤 연배가 위인 그녀는 돌아오는 길 버스 옆자리에서 특유의 동그랗고 반짝반짝하는 눈동자로 깨달은 이들이 좋고 나쁜 경계 모두 그대로 좋게 보는 이유가 무얼까 물었다.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때마침 대절버스가 3호선 지하철 역 앞에 섰다. 나는 변변히 입도 떼지 못한 채 도반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는 좀 더 걸어 1호선 역까지 가야했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답답하네요. 은유로나 표현할 수 있겠는데요."
말했다. 잠시 멈춰 서서 나를 지그시 보던 도반은 눈이 붉었다. 못다 푼 애환이 촉촉이 고여 있는 눈망울이었다.
"말로라도 꼭 대답해 줘. 이거 과제야."
그녀는 돌아 서기 전 웃으며 말했다. 나는 덩달아 웃음 지으며 기꺼이 과제를 풀겠노라 약속을 해버렸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올라 카톡으로 순례길의 소회를 주고받은 뒤 나는 지금껏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첫 주는 일상에 쫓겨, 그 다음 주는 휴가를 맞아 미뤄둔 글을 쓰고 참선 정진하느라 그랬다고 변명하진 못하겠다. 나는 일하고 생활하는 틈틈이 그녀의 질문을 떠올렸다. 비록 벽에 머리를 찧고 도로 외면하길 여러번이었느나, 그 대답을 궁리하지 않고 지나친 날은 없었다.
휴가 기간이었던 지난 목요일, 선원에서 세 번째 소참 법문이 있었다. 하안거 결제 이후 처음으로 듣는 소참 법문이었다. 나는 법문이 있기 한 시간 전쯤 선원에 와 참선을 하고 일어났다. 여러 보살님, 거사님들을 따라 좌복을 들고 맞은편 수행처로 향했다. 처음 들어가보는 긴 방에는 향 냄새가 감돌고 있었는데, 명절 아침 제사 지낼 적 맡았던 향내와 비슷했다. 여름이 다 타버리고, 가을이 시작된 것 같은 냄새였다. 향불은 저 위쪽 스승이 앉아 계신 법좌 앞에 곧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자들이 좌복을 깔고 앉자 검은 콩과 주황빛 호박 속살이 푸짐하게 박힌 흰 떡이 한 덩이씩 나누어졌다. 두 손 가득 뜨끈한 떡의 온도에서 떡 돌린 이의 정성과 진심이 느껴졌다. 이윽고 스승의 말씀이 들려왔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사제지간인 남전 스님과 조주 스님 사이에 오간 선문답이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도이니라."
"그렇게 노력하면 되겠습니까."
"그럼 어긋나는데?"
왜 어긋날까. 스승은 하나의 은유를 들어 보이셨다. 도시에 살다 귀농한 부부와 딸, 그리고 그 딸이 애지중지 기르던 고양이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과년한 딸은 귀농해서도 직장에 다녔고, 그동안 고양이는 부부가 돌보았다. 그런데 고양이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도시의 집과는 달리 시골 집에는 쥐가 들끓었다. 여태 단 한번도 쥐를 맞닥뜨리거나 잡아본 적 없는 고양이는 쥐만 보면 그만 긴장하여 도망쳐버렸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부부가 안타까운 마음에 쥐약을 사와 집안 곳곳에 놓는다. 그런데 정작 쥐약을 먹은 것은 고양이였다. 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퇴근해 고양이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지만 부부로부터 고양이가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듣고 만다. 놀란 딸이 슬퍼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보던 부부는 며칠 뒤 장에서 비슷한 생김새의 고양이를 구해 데려다놓는다. 직장에서 돌아온 딸은 이 고양이를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스승께서는 '대체불가능성'이란 표현으로 우리들을 일깨우셨다. 즉, 죽은 고양이는 딸에게 어떤 다른 고양이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고양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나 자신 또한 다른 나로 대체불가능한 고유한 존재다. 그러기에 나는 특별하다. 하지만 평소 일상 속에서 이러한 특별함은 얼마나 자주 잊히며, 평범함의 의미는 또 얼마나 쉽게 격하되는가.
부처님께서 태어나 사방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처음 하신 말씀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다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나다.' 스승께서는 우리가 이 뜻을 새기도록 잠시 사이를 두고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셨다.
뜻밖에도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속 한 장면에 대한 것이었다. 이 드라마 속 주인공은 대기업 면접관 앞에 앉아 있다. 면접관들은 지방대 출신인 그녀를 하나같이 냉랭하고 무관심하게 대한다. 일부러 곤란한 질문을 던지며 시험해보기도 한다. 입사 지원서에 취미로 피아노를 적은 것을 꼬투리 잡아 "한번 쳐보세요"라고 무리한 요구까지 서슴지 않는다. 콩쿠르나, 오디션장도 아니고 면접장에 피아노가 있을 리 없다. 그녀는 당연히 이 점을 면접관에게 환기시키나 돌아오는 대답은 심드렁하다. 이때 그녀가 차분히 웃으며 양 손을 들어올려 두 검지만으로 공기를 두드려 치기 시작한다. 딴딴딴 딴딴딴..., 하고 소리 없는 피아노 연주가 이어진다. 손 동작만으로도 단박에 선율이 들려오는 듯한, 너무나도 친숙한 곡이다. 어렸을 적 한 번쯤 쳐보거나 들어본 기억이 있는 그 곡조, 바로 젓가락 행진곡이다. 면접관은 대번에 알아채고 취미가 피아노라면서 고작 그 정도밖에 연주를 못하냐는 투로 묻는다. 그러자 그녀가 너무도 천진하게,
"특기가 아니라 취미잖아요. 잘 치진 못하지만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때 면접관이 이제까지의 얼음장 같은 태도를 슬며시 누그러뜨리고 "웃어봐요" 한마디 건넨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당당히 웃어보이는데, 그 후 이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 친구, 합격합니다."
스승께서 밝히셨다. 그리고 찬찬히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하고는 맨 처음 선문답을 되읊으셨다. 평상심이 도인데, 왜 그렇게 노력하면 어긋나는가.
"잘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안 좋은 점이 자꾸 보이거든. 힘을 좀 빼라고 하잖아. 평범함 가운데 특별함이 나오는 겁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신 평범함이란 저마다의 자신이 꾸준히, 그리고 즐겁게 이어가는 일관된 노력을 의미한다. 이 평범함이란 작위적이지 않다. 자기 자신이 매일같이 일상 속에서 기울이고 있는 노력, 그 집중된 힘과 내가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일 뿐이다. 나무 둥치와 매미가 서로 구분이 되지 않듯 스스로에게 몰두한, 겉으로는 지극히 드러나보이지 않는 상태. 이러한 내면화된 상태에서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고유하고 특별한, 창의적인 힘이 발현한다.
이와 관련하여 소설가 김연수가 쓴 문장이 떠오른다.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소설가의 일』,19쪽
지금의 나는 내가 되고자 꿈꾸었던 모습의 나는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의 나를 다른 비범해보이는 나로 대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오로지 나를 부려 쓸 뿐이다. 누구도 나 같진 않으며, 지금 쐬는 선풍기 바람과 지금 치는 자판의 탄력을 나는 오로지 나를 통해 감각한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쥐들이 갑자기 출몰해 놀라서 떨다가 때로 아프고 시험에 든 듯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쥐 잡는 수행, 참선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평범한 듯 특별한 일상의 체험이 비슷한 맥락으로 전개된다. 땀을 비처럼 쏟아내고 나니 물맛이 더없이 시원하고, 에어콘의 냉기에 시달리고 나니 땡볕이 살갑다.
여름에도 긴 셔츠를 입는 내게 누군가 넌지시 "덥지 않으십니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련다.
"더우니 시원합니다."
가끔 뜻하지 않게 존경하는 분의 빈축을 사는 경우가 있다. 딴에는 잘해보려 했는데, 그것이 되레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돌이켜 보니 한 가지 분명한 답이 나왔다. 나 홀로 잘해보려 한 것이다. 한 마디 주고받음이나 답례도 없이, 혼자 생각만 잔뜩 굴리며 나아간 결과다. 이때 맞닥뜨리는 한 얼굴의 표정은 세상이 내게 짓는 표정과 같다.
그런데 왜 나는 이따금 함께 어우러지지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오거나 적절히 처신 못해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 전전긍긍하는가.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물론 젓가락 행진곡도 쳐봤다. 젓가락 행진곡은 둘이서 연주하는 대표적인 듀오 곡이다. 즉, 두 명의 연주자가 반주와 멜로디, 두 파트를 나눠 맡는다. 이 듀오 곡을 연주할 적엔 혼자서 잘 치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 내가 반주라면, 나란히 앉은 멜로디 파트를 맡은 이의 연주에 귀 기울여 박자와 화음을 맞추고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잘 치는 것보다는 서로 잘 어우러질 때 좋은 연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 나는 고요히 홀로 앉는 의자로 자리를 옮겨 쇼팽의 녹턴 20번 c 샵 마이너나 드뷔시의 꿈, 혹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같은 솔로 곡이 못 견디게 치고 싶어진다. 그럴 때면 안절부절못하고 그때까지의 나를 내팽개쳐버리듯 자리를 박차 뛰쳐 달아나듯 움직이게 된다.
때로는 야멸찬 말을 내뱉은 죄책감 때문에 빙산의 4분의 3쯤 처박힌 상처를 파고들기도 한다. 내가 너보다 더 고통받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러나 결국 이 어리석고 우울한 일련의 과정은 나를 일깨우기 위한 방편이었음이 드러난다.
서로의 약한 부분을 채워주고 보듬어가며, 또 트라우마처럼 인력으로 안 되는 경계에 직면했을 때 버틸 수 있도록 도와가며 살아가라고 서로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관계의 참모습은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부처님이 되어간다. 그러니 힘겹다고 내팽개칠 일상이 아닌 것이다. 명연주자의 연습에 고뇌와 눈물, 땀 바다가 없었을 리 없다. 어머니가 한 생명을 낳을 때 고통 없이 낳는 경우가 없듯. 또 성장통 없는 성장이 없듯. 고통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끝까지 고통 그대로 남는 고통이 있을까.
내 보이지 않는 빙산의 4분의 3쯤에는 하나의 표정이 도사리고 있다. 모로 꺾은 고개를 잠시 내게로 돌린 두 얼굴의 표정이다. 피로에 지치고 메마른, 그러나 나에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두 얼굴은 예기치 않은 모험으로 창백하게 질려 귀가한 내 힘없는 짤막한 보고에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벌레 피하듯 고개를 모로 돌려버린다. 위로와 안심을 구했던 어린 나에게 그 표정은 모험보다 더한 충격이고 아픔이었다. 그 표정은 그대로 억눌러졌다. 이후 그 표정과 비슷한 표정을 맞닥뜨리게 되면 나는 움츠러들었다. 이를테면 평소 따르거나 존경하는 어른의 조용한 빈축을 나는 잘 견디지 못했다. 하지만 묵묵하고 질긴 고통이 연리근처럼 서로 잇닿은 최초의 빈축을 직시하게 했다. 그리하여 어리고 나약했기에 나 자신에게조차 외면받은 조그만 나를 자라난 내가 비로소 연민하며 그 울음 받아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깊숙이 억눌려 혼자만 아는 상처가 있다. 건드리는 순간, 바다 같은 울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는 그 고통은 누구보다 자신의 이해와 연민, 위로를 구하고 있다. 남보다 먼저 내가 나를 끌어안고 사랑하자. 이 말 자체는 젓가락 행진곡마냥 누구나 빈번히 들어본 특별할 것 없는 소리지만 실천되는 순간, 심금을 울리는 연주가 된다.
소리가 연주로 거듭나는 순간. 젓가락 행진곡은 젓가락 행진곡을 넘어선 감동을 준다. 이 소리와 연주 사이엔 물론 소리가 연주가 되기까지의 지난하고 평범해 보이는, 특별한 연습이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연습은 마음 먹은 대로 잘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적도 있다. 그럼에도 연습을 하는 한, 나는 단 하나뿐인 대체될 수 없는 연주자다. 때문에 그 연습곡은 매일같이 새로 울려퍼지는 음악이다. 우리는 누구도 서로 같지 않다. 흑건과 백건에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의 감촉, 건반을 누르는 깊이와 탄력의 정도, 애태우는 소절과 환희하는 곡조, 실수와 성취에 따른 일희일비와 한 음 한 음 울려퍼지는 색조는 저마다 다르다. 오로지 나만이 느끼고 보며 체험하는 것이기에 특별한 평범함이다. 또 그래서 즐겁다. 이 즐거움이 날마다 새롭게 이어질 때 소리는 어느덧 연주가 되고, 특별한 평범함은 평범한 특별함으로 체득된다.
이것은 하나의 은유다.
도반의 질문과 나의 자문, 스승의 법문과 나의 고통에서 비롯된 나름의 통찰이 '연기롭'게 이어진 결과 쓰여진 대답이다.
이 하나의 대답은 대답함으로써 끝이 아니다. 양손과 심장, 두 발로 오롯이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언행일치, 그 시작은 나 바로보기에 있다. 거울에 비춰지는 나도 아니고, 머릿속 생각도 아닌 나.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 화답처럼 지천에 매미소리 가득 울려오고, 문득 그치는 찰나 여전히 듣고 있는 내가 있다.
이 나엔 코가 없다.
이것, 하고 집중하는 순간 코를 뾰족 내미는 꼴이 된다.
코 내밀기 이전의 편평한 그 자리를 돌아보자.
매미 울음보다 쫘악 펼쳐지는 그 자리에
코 없이 투명한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