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겁劫을 달려 왔습니다

그러고도 타닥타닥, 스승의 가락을 좇아

by 수연


"한 손으로 치는 박수 소리가 들리십니까."


스승께서 물으셨다. 나는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이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만 듣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소리 없이 밀려드는 울림 속에서 까악, 목소리가 내고 싶었다. 한 번도 태어난 적 없는 나를 끄집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약돌처럼 묵묵히 가라앉아 있었다. 눈 귀 코, 입술 사이를 틈 없이 막고 지나가는 투명하고 흰 숨길과 하나되어 있는 것이 아늑하였다.

설령 움직인다고 이 속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대로 수백 보를 걸어나간다 하여도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를 한 치도 여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것이 나 없음의 상태. 하지만 나는 서툰 잠수부마냥 가부좌 튼 다리가 뻐근하니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입에 문 호흡기 사이로 뻐끔 물거품이 일어나고 걷잡을 수 없이 머리가 수면을 흔들며 솟구쳐나오려는 순간.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몰아쳤다. 두 손이 마주쳐 짜악, 퍼져나가는 그 소리에 스승께선 여전히 미소로운 어조셨으나,


"아니, 한 손으로 치라니까....."


하시며 넌지시 말끝을 흐리셨다.


나는 스승과 문답을 나누고 싶었다. 눈이 뚫려 시원해진 경험을 증명하는 활구活句를 내뱉고 싶었다. 실제로 몇몇 산뜻한 경험 후 지은 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억일 뿐이었다.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현전하여야 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뭍으로 끌려나온 잠수부는 따끔한 소금기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소금은 희었다. 많은 눈물이 말라버린 흔적이었다.


이 소금기는 끊임없이 되새기게 했다. 내가 지금 펼쳐진 그대로의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된 것을 떠올려 그 사물에 덮씌워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즉,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덮씌워진 기억을 보고 있다고 말이다. 가령, 한 사람의 찌푸린, 혹은 웃는 표정에 대해 나는 그 순간 나타난 대로 보지 않고 예전에 보았던 비슷한 표정과 그때 그것을 보고 내가 느낀 쓰라린 감정을 투사해 보고 있었다. 이따금 내게는 '생각 소리'가 들려온다. 얼마 전 나는 이 '생각 소리'에 따라 똑같은 추상화가 다른 모양으로 바뀌어 보이는 것을 경험했다. 연둣빛과 초록 색조가 점층적으로 뒤섞인 한 그림이 처음엔 남녀의 모습으로 보이다가 잠시 후 '예쁘다' 연발하는 남자애 목소리의 생각이 들려오자 문득 고개 숙이고 홀로 걷는 어린 소년의 뒷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미망이 거듭 확인되자 나는 본다는 행위에 사뭇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법거량을 하려던 먼젓번의 호기와 배짱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아무리 느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나는 앞사람의 뒤통수에 얼굴을 숨기고 기웃기웃 스승의 말씀을 들었다. 돌연, 스승이 내 이름 뒤에 보살님을 붙여 똑똑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서도 소리가 잘 들리십니까?"


나는 에어컨 바로 앞, 제일 끝줄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네.", 대답했다.

스승께서 뜻밖에 고개를 내 쪽으로 탁 돌리시고 "정말?", 물으셨다.

나는 다시 "네.", 똑같은 어조로 소리 내었다.

"정말?"

스승의 세 번째 부르심이었다. 짐짓 미소로운 어조로, 그러나 갈라진 음성이었다. 이 불안하고 아픈 울림은 또 빙벽 아래로 로프를 던지는 사람의 가슴에 맺힌 푸르스름한 살얼음이 부서져내리는 소리로 바뀌어 들렸다.


나는 그럼에도 꾹 눌러 잠그고 "네", 하고 말았다.


스승이 출가한 암자의 이름은 '홍제弘濟암'이었다. 넓을 홍에 구제할 제. '널리 구제하다.' 스승은 한 번 더 손을 내미신 것이었다. 내가 첫눈에 미혹했으나 변함없이 크신 그 손바닥을 쫙 벌려 내뻗으신 것이었는데.....




2주 전 해인사 대중 공양 가는 길, 대절 버스 안에서도 스승과 나의 거리는 이 세 번째 소참 법문 때 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다. 스승은 운전석 가까이 창가 자리에 앉아 계셨고 나는 여럿이 일렬로 같이 앉는 맨 뒷좌석에서 통로로 뻥 뚫린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대각선 왼편으로 빙산의 일각처럼 솟은 스승의 뒤통수가 언뜻 의식되었으나 눈길을 향하진 않았다. 나눠 받은 뜨끈한 영양밥을 차근차근 먹으며 양 옆자리에 앉은 한쪽은 앳되고 한쪽은 원숙한 보살님들, 법우님들과 반갑게 인사와 환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버스가 익숙한 건물들을 벗어나 산을 낀 고속도로를 달릴 즈음 선원 본부 팀장님의 집전 하에 아침 예불이 시작됐다. 맨 앞좌석 위에 내걸린 모니터 화면이 켜지고 녹음된 목탁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삼귀의와 반야심경,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차례로 왰다. 어느덧 마지막 사홍서원四弘誓願이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로 시작해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로 끝나는 보살의 네 가지 큰 서원이, 당긴 고개를 더 깊이 숙이게 했다. 기도가 너무 짧게 느껴졌다. 난 속으로 의상 조사님이 화엄경의 요지를 함축해 담은 법성게 7언 30구를 더 왰다. 가는 곳이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그 이름을 딴 해인사가 아닌가. 더욱이 나는 초행길이었다. 묵묵한 바다 수면처럼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본래의 부동한 마음자리에서 도달하고 싶었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시나브로 담담해지며 첫 번째 휴게소에 가까워져 갈 무렵이었다.

문득 스승께서 일어나 내 자리까지 쭉 뻗은 긴 통로로 나와 서시고는 마이크를 잡으셨다. 이쪽을 마주보고 계셨다. 나는 스승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내가 스승께 글을 전하고 난 뒤 처음 뵙는 자리였다. 스승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말씀을 이으셨다. 일관되게 지긋한 눈길과 미소로운 어조로 내 글의 한 자락을 넌지시 비추시며 좌중들에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아직도 '몽중'에 있어? 이제 기지개도 켜고, 일어나!"


하며 친근하게 채근하셨다.


나는 단박 스승의 화답을 알아듣고는 '기지개', 하고 말씀하실 적 퍼뜩 두 팔을 들어올려 기지개를 켜 보였다. 우리 제자들은 다 같이 웃으면서 고개를 바로하고 스승의 말씀에 귀 기울였다. 순례 일정에 관한 것이었는데, 스승께선 팔만대장경이 보존된 장경각과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대적광전, 그리고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 분투하신 사명대사 비를 비롯하여 사명대사 님이 입적하시고 스승께서 출가하신 홍제암과 그곳에서 머리 깎고 주석하신 역대 스님들의 법명이 새겨진 비석을 돌아본다 하셨다. 나중에 직접 그 앞에 서서 눈으로 차곡차곡 획들을 더듬으며 비석 중간 높이쯤 왔을 때 나란히 열 지은 법명들을 따라가다 가장자리에서 친숙한 한자를 발견했다. 스승의 법명이었다. 스승은 그 단단한 이름처럼 새겨진 것같이 한결같은 눈빛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나직한 음성으로 홍제암으로 찾아오면 자신이 출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약간 꿈꾸는 기분으로 "네." 하며 고개를 끄덕했다.


버스가 첫 번째 휴게소에 다다랐다.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스승께선 다른 버스로 옮겨 탄다고 알리셨다. 1호에서 8호차까지 무려 300여 석이 꽉꽉 차도록 많은 제자들이 동행한 순레길이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모습을 비추시고 말씀을 전하셔야 했다. 인원이 많은 만큼 절에 도착하면 앞뒤로 빽빽이 둘러싸여 가게 될 테니 지금까지처럼 못 챙겨준다며 잘 따라오라고 당부하신 뒤 스승이 내리셨다. 나는 먼젓번 낙산사 순례 때 도반과 같이 홍련암에 들렀다 기도를 하느라 행렬을 놓치고 버스 탑승 시간에 늦은 적이 있었다. 당시 법당에서는 청년처럼 보이는 젊은 스님이 천수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묘장구대다라니 한 번만 따라 외고 나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스님의 독송이 뜻밖에 낮고 잔잔하게 깔리며 심해에서 흘러나오는 듯 마음을 깊숙이 가라앉혀 주어 그만 최면에 걸린 듯 계속해서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따라 왰다. 만약 나란히 앉아 있던 도반이 어깨를 톡톡 두드려 깨워주지 않았다면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모른다. 내게는 하나에 집중하면 그 나머지 것들을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나는 다짐했다. 이번에는 정신 바짝 차리고 행렬에 딱 붙어 가자. 어디서도, 그토록 가보고 싶어한 장경각에서도 결코 지체하지 말고. 홍제암부터 가자고.


새로 사귄 법우들과 어울려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스승이 부재 중인 버스에 올랐다. 길고 꿈결 같은 빛을 밝힌 터널을 지나 높고 푸릇푸릇한 봉우리와 첩첩이 이어진 산줄기, 그리고 그 위를 헤실헤실 지나는 서늘하니 텅 빈 구름 층과 안개의 흐름을 거듭거듭 뒤로 하다 보니 어느새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伽倻山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가야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6년 간 고행한 고행림苦行林이 있던 산의 이름과 같다. 스승께선 나중에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셨다. 그리고 해인사로 향하는 산길이 높고 가파른 것은 원래 수행이 이와 같이 고된 길임을 환기시켜 주는 의미가 있다고 일깨워주셨다. 마침 산중은 강원에 계시는 스님들까지 철야를 이어가며 24시간 용맹 정진하는 기간이라 했다. 참으로 수행은 고행, 땀 흘려 올라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 흘린 땀만큼 스스로를 밝히고 깨칠 수 있는 철두철미한 정진이 바로 수행의 참모습이라고 볼 때, 사명대사 비에서 이따금 땀이 흐르는 것도 불가사의라기보다 정진의 참뜻을 새기고자 하는 후세 사람들의 염원이 현현한 것은 아닐는지.

텅, 고막이 막혀왔다. 갑자기 비행기가 이륙한 듯 귓속이 먹먹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체감하는 높은 곳의 감각이었다. 드디어 버스에서 내려 직접 그 높은 산길을 걸어 오르자니 입가가 실룩이며 절로 신이 났다. 더욱이 대적광전에서 법신불法身佛께 삼배를 올리고 나와 그 옆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장경각에 이르자 마음이 뭉게뭉게 부풀었다. 범종 모양 문을 지나 양쪽으로 도열한 나무 창살 틈새로 먹물 빛깔 경판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닿았다. 그 안에 새겨지고 도드라진 획들에서 칠백팔십여 년 전 전쟁통에 경전을 새긴 각수들의 지극한 마음이 읽혔다. 오래된 세월의 냄새가 맡아졌다. 나는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땅에 되살려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 각수들의 고행과도 같은 판각의 정신이 아닐까 싶었다. 나중에 듣게 된 해인사 주지 스님의 원력도 이와 통하는 것이었다. 스님께서는 법문 때 자신이 주지로 있는 동안 전문 교육을 통해 각수들을 배출하여 경판 80개를 제작하겠다는 뜻을 밝히셨다. 또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이 뜻은 계속 이어지도록 하여 총 200개의 경판을 완성하겠노라,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부디 이 원력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13세기 초반 몽골군이 쳐들어와 고려인들을 습격했을 당시 집과 나무들이 불타고 가족들이 죽어 나뒹구는 상황에서 칼날로 적들의 심장 대신 나무판을 파들어간 각수들이 있었다. 무기를 거두고 오롯이 내면을 향한 고려인들의 사무치는 결의와 피땀, 그리고 눈물이야말로 경판에 새긴 글자와 한가지란 생각이 그치지 않았다. 이 마음을 되살리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각으로. 전해질 수 있게 쓰자. 그렇게 다짐하고 되새기며 찍을 수 없는 것을 포착하려 셔터를 연방 누르는 사이 아뿔사, 홍제암이 멀어졌다. 나는 뒤늦게 스승의 당부를 떠올리고 계단을 내려가 뛰었다. 스승께서는 이미 말씀을 마치셨는지 암자 밖 마당으로 걸어나오고 계셨다. 나는 후다닥 다가가 멈추며 "벌써 다 하셨어요?", 물었다. 스승은 그대로 앞만 보고 걸어나가시다 다소 착잡해 보이는 옆얼굴을 하시고는 "얼른 참배하고 와." 나직이 응답하셨다.


이런 식으로 나는 스승에게 이끌렸다 여지 없이 엇갈리고, 그 뜻에 어긋나기를 되풀이해 왔다. 내가 팔만 개의 나무 글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제때 홍제암에 도착했더라면 스승은 내게 어떤 말씀을 전하셨을까. 어쩌면 한 번 보고 맡으면 다시는 잠들거나 깨지 않을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준비하셨을 수도 있는데. 전할 길 없는 그 꽃은 이제 스승께서 도로 가져가셨겠구나, 생각하니 명치 밑이 꽉 메여 왔다. 그래도 짐짓 태연하게 등산화 끈을 풀어 벗어놓고 고적한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스승과의 차담에서 비운 찻잔처럼 이 법당 또한 내가 들어가본 중 제일 작고 아담했다. 바닥에 깔린 나무는 그을린 것마냥 짙고 오래되어 보였다. 목조로 된 모든 질감과 색조가 고색창연했다. 솔직히 너무 소탈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일었다. 하지만 더 감상할 겨를은 없었다. 지금쯤 스승께선 사명대사 비 쪽으로 가 계실 것이었다. 나는 퍼뜩 상단에 모셔진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돌아섰다. 오른쪽 벽면에 한 노스님의 영정이 하얗게 사르어지는 향연 너머로 비쳐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틀 전 15일 입적하신 성타 큰스님이셨다.


나는 큰스님의 입적 사실을 돌아오는 길, 갑작스레 옮긴 자리의 옆좌석에 앉아 계시던 보살님의 카톡 소식을 통해 알게 되었다. 현판에 한자로 伽倻山海印寺가야산해인사라 쓰인 일주문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길을 오르다 한 노보살님이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걸음을 떼던 모습을 보았었다. 바로 이 노보살님과 자리를 바꾼 것이었다. 내 자리가 유일하게 트인 좌석이라 아픈 다리를 펴고 그나마 편히 앉을 수 있었던 때문이다. 나는 저간의 사정을 선원 봉사자님으로부터 듣고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승의 자리 바로 뒤편 창가 좌석이었다.


내 옆에 나란히 앉으신 분은 이날 우리가 아침으로 먹은 영양밥을 보시한 보살님이셨다. 첫눈에 교양이 높고, 고상한 차림에 세련된 인상을 지닌 분이셨다. 그 분은 자신이 화가이자 시인이라고 밝히셨다. 나는 그 분을 선생님이라 호칭했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읊조리듯 건네는 말씀에 때로는 장단을 맞추고, 때로는 여쭤도 보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분은 내게 여태까지 자신이 전시하고 수상한 미술 작품들과 문예지와 신문에 실린, 또 블로그에 직접 올린 시와 그림을 찬찬히 보여주셨다. 최근 유행하는 펜드로잉 장르며 자신도 새롭게 시도하고 더불어 심사도 맡고 계시다는 어반스케치 작품들도 하나하나 소개해주셨다. 적어도 한 작품에 빠르게는 두서너 달, 길게는 2~3년에서 수 년까지 걸리는 동양화와는 달리 이 어반스케치는 하루면 충분히 완성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서툰 솜씨라고 겸허히 속삭이시며 주택가 정경을 그린 자신의 첫 어반스케치 작품을 보여주셨다. 드문드문 시작한 대화가 사뭇 열띠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분은 예술가답게 순수하고 편견 없는 마음씨로 까마득한 후배의 의견을 존중하고 인정해주시며,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또 "자기 소설 쓰면 잘 쓰겠다"라며 믿기지 않는 찬사와 격려까지 전해주셨는데, 차츰 기운이 떨어지고 피로감을 느껴서일까. 나는 오랜 습성과 타성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만 과거로 마음이 비긋이 기울어 "썼는데 떨어졌어요." 뇌까리고 말았다. 지금 소설을 쓴 것도, 공모전에 새로 응모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자꾸 지나간 버스의 꽁무니를 쫓는가. 새로 오는 버스에 올라탈 생각은 않고.


나는 문득문득 홍제암에서의 어긋남과 내가 놓쳤을 스승의 말씀을 떠올리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어느덧 화제는 일체가 오직 인식 작용에서 비롯한다는 유식 사상에 대한 것으로 접어들었다. 유식唯識에 따르면 인간의 심리 구조는 크게 세 층위로 나뉘어진다. 제일 위층이 6식으로,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에 의한 인식 작용 다섯 가지와 대상을 직관하는 가장 단순한 차원의 의식을 묶어 통칭한 것이다. 가운데 층은 '나'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이것 저것 분별하고 집착하는 7식, 바로 자아의식이다. 그리고 지하에는 위의 두 인식 작용의 뿌리가 되는 8식이 있다. 이른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불리는 이것은 심층의 cctv와도 같이 자신이 살면서 생각하고 행한 모든 것을 기록한다. 가령, 어렸을 적 뭣도 모르고 개미집을 나뭇가지로 쑤셔 허물었던 것까지 고스란히 저장되어 씨앗으로 심겨지는 식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가리켜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유식설唯識說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모든 활동이 알고 보면 기억된 것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나는 앵무새처럼 말하고 싶지 않다. 과거를 짜깁기한 유령처럼 신선한 오늘을 몽환적으로 배회하고 싶지도 않다. 이러한 상태는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입력된 대로 되풀이하는 자동인형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참선을 한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잔잔한 수면처럼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고 바로보기 위해서 말이다. 참선은 대단히 창의적인 것이다. 기억된 것이 아니라 지금 나타나 있는 그대로 볼 때 새로움이 솟아나고 변화가 일어난다. 그런데 나는 변화하고 있는가. 자꾸 기억에 발목 잡혀 새로운 한 발짝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더욱이 그 기억조차 반쪽자리였다. 장편소설이 떨어지고 2년 뒤 나는 고비와 기회를 동시에 맞으며 새로 단편소설을 썼다. 그리고 그때 인연 맺은 사람들과 공동으로 책을 냈다. 첫 책이었고, 표지는 타오르는 것 같은 놀빛이었다. 올 4월의 일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생애 첫 안거가 시작된 지 삼 주째 접어든 여름엔, 글벗 가운데 전시 공간을 기획하는 젊은 친구가 있어, 그의 제안으로 출판사 멤버들과 또 생애 첫 '글 전시'에 참여했다. 함께 벽면에 붙인 짧은 산문은 현재 다른 산문, 시와 더불어 갤러리 측이 기획한 '암실' 컨셉대로 어둠 속에서 관람객이 켠 휴대폰 손전등에 불 밝혀져 한 자 한 자 읽혀가는 중이다. 이 또한 함께 썼기에 얻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이고 경험이다. 780여 년 전 고려의 각수들도 8만 개가 넘는 나무 판에 5223만 152자를 함께 새겨나갔다. 갑자기 쳐들어온 몽골군에 의해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린 이후였다. 이렇듯 새로 만들어졌기에 재조再造대장경이라고도 부르는 이 활자가 지금까지 살아 숨쉬며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주지 스님 말씀대로 '역사가 있는' 절 해인사였다. 좁은 목조 창살 틈새로 그 역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넘겨다보고 그토록 경탄하면서도 정작 그러는 자신의 역사는 제대로 돌아보지도,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려 들지도 않은 채 눈살을 찌푸리고 지나치기 바쁘구나, 하는 자각이 문득 왔다.


나는 살면서 글을 쓰고 싶었다. 삶과 분리되지 않는 씀, 수행과 하나인 예술을 체험하고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타의 공모전을 뒤로 하고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브런치 작가가 된 것은 3월 20일, 단편소설을 완성하고 템플스테이를 다녀온 직후다. 나는 템플스테이 경험과 당시 새롭게 다시 읽은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바탕으로 두 편의 글을 써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두 번째 시도였다. 고백하자면, 2년 전에도 한 번 신청했다 떨어졌었다. 그때 나는 너무 서둘러 소개 글과 계획안을 작성하는 바람에 글이 뜬구름 잡듯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흘렀고, 가장 중요한 심사 대상이 되는 작품도 새로 쓴 것이 아니라 예의 장편소설을 별도의 편집 없이 200자 원고지 기준 980매가 넘는 길이 그대로 주욱 올려버렸다. 한마디로 욕심만 앞서 덜컥,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래, 그건 도전이 아니라 저지름이었다. 적어도 도전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마땅한 노력과 준비가 전제되어야 한다. 즉, 욕심이 아닌 정진이 앞서야 한다. 그런데 2년 전 나는 정확히 그 반대로 행동했고, 탈락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결국, '떨어졌어요', 하는 이 말엔 도전에 따르는 노력을 부담스러워하는 내 뿌리 깊은 게으름이 작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고행림으로 접어들기 싫어하는 마음. 정진을 꺼려하는 마음. 그대로 안주하고자 하는 어리석음. 내가 피로감이라고, 습성과 타성이라 뭉뚱그려 일축해버린 감정의 정체가 이 게으름의 다른 표정 아니고 무얼까.


속으로 괴롭게 자문하고 있을 때였다. 그 분은 한때 쓰려고 시도했다 여의치 않아 그만둔 소설의 소재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셨다. 그 소재는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 묘하게도 방금 내가 떨어졌다고 말해버린 장편소설의 소재 또한 시간이었다. 나는 복잡한 감정을 명치 아래로 누르며 잠자코 그 분의 말씀을 들었다. 경전 속 천신들이 누리는 긴 수명과 행성들의 서로 다른 하루 길이. 가령, 금성의 하루는 지구 시간으로 117일이며, 경전 속 1겁의 시간은 가로 세로 높이가 1유순(40리), 즉 거의 16km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를 100년에 한 번씩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그 얇디 얇은 날개 옷깃으로 한 번씩 스치기를, 바위가 모조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하여도 다하지 않는 세월이라 했다. 나는 나중에 우연히 검색을 통해 알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8000겁, 형제자매와의 인연은 9000겁, 그리고 스승과 제자로 만나려면 그보다 더 오랜, 무려 만 겁의 인연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버스가 휴게소에 섰다. 내 자리 앞좌석 등받이에 달린 고리에는 매듭이 꽉 묶인 비닐 봉지가 걸려 있었다. 매듭을 풀고 쓰레기를 비닐 안에 모아 담던 중 비어있는 줄 알았던 음료수 통의 고인 물이 흘러 내 바지를 조금 적셨다. 그 분은 서둘러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는 버스에서 내리는 그 분을 뒤따라 쓰레기 봉지를 들고 휴게소로 걸어나갔다. 그 분이 화장실에 간 동안 분리수거를 끝내고 다시 버스에 올라 앉아 있으려니, 스승께서 다시 승차하셔 모습을 보이셨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슬며시 "안녕하세요." 했다. 내 바로 앞자리로 들어오신 스승의 모로 향한 왼쪽 눈동자가 일순 내 눈과 비스듬히 부딪치며 표변했다. 마치 늘어진 줄이 눈 깜짝할 사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승은 단박 어조를 가다듬고,


"잠깐 여행 다녀왔습니다."


하셨다.

때마침 그 분도 버스로 돌아와 자리로 들어오셨다. 내가 잘 다녀오셨어요, 할 적에 그 분의 눈길은 스승을 향해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이 자리에 앉아 계시던 노보살님이 다가와 웃으시며 이제 다리가 괜찮아졌다고 도로 여기에 앉아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얼른 답하고 맨 뒤의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기분이 묘했지만 의아하진 않았다.


스승은 내게 홍제암에서의 첫 번째 기회에 이어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이었다. 바로 작가로서, 어른으로서 성장하는 데 좋은 영향을 주고 본보기가 될 만한 분과 인연 맺을 기회. '연기롭게', 즉 인간답게 변화하고 꾸준히 정진하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삶으로 나아갈 기회 말이다.


그리고 올 하안거 마지막 소참 법문 자리에서 또다시 기회를 주셨다. 이 즈음 우리 집 베란다 화단엔 이미 봄날 주홍의 꽃을 피워낸 군자란이 개화시기를 한참 지난 한여름에 두 번째 꽃을 피워 올렸다. 나는 이 놀빛 꽃을 법화法化라 여겼다. 무엇보다 귀중한 기회였다. 가까이서 법문 듣고 눈을 바로 뜰 수 있도록 스승께선 힘주어 세 번이나 간곡히 불러 주셨다. 그러나 나는 이 부르심에 세 번 다 응하지 않았다.





스승께선 요즘 삭발을 자주하노라 말씀하셨다. 흰 머리가 빨리 자라 그런다시며, 세월이 금방 지나감을 애타게 일깨우셨다.

"죽으면 사라져. 그러니까 나중에 하지,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생사를 건너가야 돼."

스승께선 전에 없이 일절 여운을 남기지 않으시고 단호히 맺으셨다. 며칠 전 세수를 하고 거울 속에서 번득이는 백발을 한 터럭 발견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부러 이 백발을 뽑지 않았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문장은 내가 한때 좋아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나오는 경구로, 미래에서 온 소년 치아키가 게으른 주인공 소녀 마코토에게 넌지시 전한 말이다. 이 두 소년 소녀는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속 대위법적으로 연결된 두 선율처럼 한쪽은 닿을 수 없이 빠르게 나아가고, 나머지 한쪽은 그 뒤를 쫓아 있는 힘껏 달려나간다.


나 또한 지금 스승의 부르심을 뒤쫓는다. 첫 번째로 'Time waits for no one.' 이 전하고, 내 머리에 돋아난 한 가닥 백발이 두 번째로 전하고, 세 번째로 스승께서 전하신 그 뜻을 얼른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깨!


이 한마디에 담긴 뜻은 되풀이해 변주되어 전해졌다.


그리고 스승께선 한 번 더 간곡히 전하셨다. 두 손바닥을 맞붙여 합장하고 잘 들어보라 이르시고는 처음으로 게송을 읊으셨다.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듣고 싶었던 스승의 가락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가락을 먼 발치에서 듣고 있었다. 거북처럼 목을 쑥 집어넣은 채. 이 움츠러든 거북 목을 누구도 대신 빼내줄 수 없다. 오직 내가 이 목을 빼내야 한다. 그래서 쓴다. 불멸하는 내가 생멸하는 나를 부려 쓸 때에야 비로소 나로부터, 동시에 나에게서 시작된 생사로부터 자유로우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두 손 펼쳐 타닥타닥 스승의 가락을 좇아 간다. 밤길, 돌아보면 어김없이 뒤를 쫓고 있는 달과 같이.


나아가는 나와 돌아보는 나를 소리 없이 비추는 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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