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은 시월詩月

빈칸으로 채워진 의미

by 수연


청딱따구리 소리를 들으러 간다.

여름 한복판에도 초저녁이면 매미 울음 깊숙이 고여 흐르는 것 같은 이 소리가 들렸다. 피리를 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내 심금을 건드리며 파고드는 소리였다. 계절이 바뀌고부터는 더 자주, 또렷이 들려왔다. 푸르고 적막한 가을 숲 깊숙이 서늘하고 어슴푸레한 사각지대가 그려졌다. 휘이, 휙휙휙. 첫 소리와 연이은 소리들 사이에 호소하듯 당기는 간격. 스승의 가락같이 청색에 벼린 음조였다.


내게는 스승이 있었다. 말씀을 전해 듣고, 날마다 새기며 홀로 스승님, 부르는 분이 계셨다. 이따금 목이 죄여올 때 이 사실을 떠올리면 떠올리는 것만으로 숨구멍이 트였다.


그랬다. 내게는 스승이 필요했다. 살면서 가까이 찾아뵐 수 있는 어른. 딱 지금의 스승 같이 너무 연로하시지도, 그렇다고 너무 젊지도 않은 연배에, 문학적 감수성과 안목을 살려 선에 대해 일러주시고 때로 선사다운 눈빛으로 감응을 주시기도 하는 분. 아니, 무엇보다 내 허를 찌르고 정곡을 찔러 시야를 새롭게 하고 바라보도록 일깨워주시는 분.


나는 스승의 말씀을 쬐고, 눈빛을 쬐었다. 태양보다도 내게는 더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덥석 다가드는 추위도 무릅쓸 수 있었다.


나는 또 오아시스가 필요했다. 우연찮게도 내가 스승의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는 선원의 둥근 아날로그시계 문자반엔 ‘Oasis’라고 적혀 있었다.


직사각형 쫙 펼친 B6 책만 한 크기의 화면을 마주보며 소리 없이 그날그날의 업무를 이어가는 내 사막 같은 책상으로도 이따금 녹음으로 젖은 듯한 탁목조의 가락이 날아들었다. 주중에 나는 이른바 디지털 유목민 생활을 한다. 매일 아침 노트북을 켜면 방 안으로 펼쳐지는 온라인 사회. 이전처럼 낯설지만은 않은 이 세계에서 우리는 의자를 타고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 속 언덕을 넘어간다.

그 사이 가을 보름이 다가왔다. 우리들은 환해진 달빛에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발견한 듯 부랴부랴 인사를 주고받기 바빴다. 나는 이때다, 싶어 스승께 카톡으로 안부를 여쭙고, 오래 간직한 참회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날 밤이 지나고 온 스승의 덕담은 ‘행복한 날 들 되소서!’로 끝맺고 있었는데, 보다시피 ‘날’과 ‘들’ 사이에 탁목조가 쫀 것 같은 빈칸이 있었다.

그 빈칸의 의미는 확연하였다. 특정한 날만 행복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행복할 줄 알라는 일깨움이자 애틋한 당부였다. 여백으로 뜻을 강조하는 스승의 화법에 나는 경탄하였다. 그 한 칸의 비움으로 덕담은 선담으로 피어났다.

그리고 눈 뜨니, 시월이었다. 나는 내 사막 같은 책상으로 흘러드는 시원한 물맛에 놀랐다.


시월은 시월詩月

시월 이일, 연휴 사이에 낀 월요일에

시간은 뒤에서 끄는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고

도토리가 탁, 정수리를 치는 소리


나는 숲의 빈칸을 즐기며 일광욕을 한다

시월의 첫 금요일엔

무엇이 나무를 지탱시키는가 묻다

땅 위로 울근불근 뚫고 나온 뿌리의 힘을 목격했다


시월 둘째 주 토요일 참선 가는 지하철에 앉아

객실 내 구걸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스피커로 역무원이 당부하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나는 구걸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다

해바라기가 태양이다

소리 없이 외친다

가을은 이토록 풍요롭게 익어가고

경계는 사뭇 흐릿해져

정오 무렵 경계선 장애를 앓는 이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다

나는 오른 눈이 타들어간다

아니, 익어가는 중일까

불혹도 성장통을 앓는다

길가엔 낙엽이 쉬는 붉은 벽돌 빛깔 새 벤치도 놓여 있는데

나는 그냥 선 채로 쓰다 걷는다

머물고 싶지 않아

이동이 나의 본질

선 채로도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각수의 꿈을 새기며

문득 살아나는 것이

고개 숙이고 걷던 길 앞의 나무가 미소롭고

찬란한 시월詩月

가린 것 없는 물빛 하늘로

반짝이는 흰 점묘화

바람이 서늘히 불어와 이 몸을 휘감고 지난다

너희가 위화僞花라는 것을 알아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갑자기 찔러대도

비망록備忘錄

눈 깜짝할 사이

구름 사이 부시게 쫀 것 같은 빈칸이 드러나고

나의 둘레가 보이지 않는다

태양을 꼭 마주보아야만 태양의 존재를 알 수 있나

눈앞의 신선한 나무 한 그루가

뗄 수 없는 그림자가

태양을 증명한다

해바라기는 태양의 원력이다

촛불의 심지에 불이 붙고

접힌 부채를 탁 펼치고

북을 쿵덕 치고

열차가 출발할 때

펼친 손가락을 접어 엄지와 중지를 맞붙이고 딱, 퉁기기 직전, 혹은 그 직후

나는 어디에도 없는

청딱따구리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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