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주은 조약돌 1
붙잡으려 하면 달아나는 새들처럼
어제 새 이력서를 썼다.
최근 내게 강사로서의 업을 이어가도록 기회를 준 회사가 있었다. 그 회사 양식에 맞게 다시 이력서를 쓰고 보내야 했다. 이력서의 한 항목에는 ‘나를 나타내는 세 가지 단어’를 적는 빈 칸이 있었다. 이미 움켜 쥔 단어들이 몇 개 있었지만 창의적인 뭔가가 더 있을까 싶어 좀 더 궁리해보았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린 창이 어느덧 푸르스름했다. 요즘의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들의 목록.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적었다. 도전, 이야기, 그리고 줄탁동시.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잇는 단어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도전은 나의 현재였다.
방금 지난 11월까지 내가 소속되어 있던 학원으로부터 경력증명서를 전송받았다. 이것을 요청하기까지 오랜 망설임과 두려움, 면목 없음과 아쉬움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이런 때 내가 주로 붙잡는 단어는 단념, 혹은 포기였었다. 하지만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기로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때마침 내면에서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네 제자들이 똑같은 상황에 처할 때 넌 이렇게 말할래? 부끄러우니까 포기해, 네 권리를.
차마 그럴 순 없었다. 내 이익보다도 그곳에서 보낸 인생의 자락을 헛되이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담아, 그리고 감사를 담아 석 달 만에 처음으로 카톡을 남겼다.
학원에서는 담담하면서도 친절하게 응답을 보내왔다. 곧 이메일로 근무시간과 직위, 그리고 '재직하였음을 증명함' 이라는 문구가 선명한 서류 파일이 왔다. 증명서 제일 하단에는 내가 단 한 번도 뵌 적 없는 원장님 이름 옆으로 큼지막하고 또렷하게 찍힌 인감도장 한자가 붉었다. 한 시기가 마감되었음을 알리는 직인. 잠시 감정이 물결 쳤다. 앞으로 떠밀려 나아가던 부표가 한 순간 물러나는가 싶더니 물결을 타고 다시 넓은 곳으로 흘러나로는 느낌.
새 길로 접어들었구나, 비로소 실감이 났다. 차곡차곡 밟아 나갈 과정들이 푸른 잎을 단 나무들처럼 내 앞에 늘어서 있었다. 나는 숲길에 와 있는 기분으로 홀가분히 지금 현재를 숨 쉬었다.
이력서를 쓰기 전 오후, 가벼운 산책을 했다. 인근 도서관 뒤편에 있는 숲이었다. 숲 길 구석마다 밧줄로 얽어맨 난간이 초대하듯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다리 너머는 둘레길이었다. 나는 반듯하고 환한 빛깔로 다져진 흙길을 건너와 걸었다. 새소리가 들렸다. 한 두 종류의 울음이 아니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숨어 보이지 않는 새소리가 곱고 청아하게, 유리구슬 굴러가듯 울려퍼졌다. 백일몽을 쪼는 알람소리 같았다. 나는 여기서 깨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두 귀는 다른 소리를 더 찾고 있었다. 그 길에 보았다. 검고 흰 털이 마치 작디작은 펭귄을 연상시키는 박새. 몸집에 비해 제법 통 크고 소탈한 아주머니 웃음 소리를 내는 녀석이었다. <전쟁과 평화>에서 피에르와 결혼한 후의 나타샤가 웃었을 법한 웃음이었다. 혹은 영화 <줄리 & 줄리아>에서 줄리아 역의 메릴 스트립이 평범한 중년 부인이었던 자신을 전설적인 프렌치 셰프로 기억되도록 변화시킨 그 웃음. 맛보다도 그녀 특유의 털털하고 넉살스런 중저음의 웃음이 기가 막혔던 요리들이었다. 자신만의 레시피를 선보일 때의 떼굴떼굴 구를 것만 같은 웃어젖힘은 특히 맛보고 싶은 종류였다.
박새의 유쾌한 울음이 소환한 웃음들이었다. 나는 박새를 찍고 싶어졌다. 시부저기 살피며 가방 지퍼를 열고 휴대폰을 꺼내 비밀번호를 누르는 사이, 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원래 새들이 기민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번번이 내 손보다 빨랐다. 나는 기어이 녀석들을 찍겠다고 다시 휴대폰의 카메라를 들이댔다 자취는 없이 소리만 무성한 정경을 여러 번 맞닥뜨렸다.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이 솟구쳤다. 내가 휴대폰을 도로 가방에 쑤셔넣고야 박새들이 날아왔다. 새들은 고 작은 부리로 낙엽이 깔린 땅을 콕콕 쪼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네들의 생계 현장에 와 있었다. 공연히 카메라를 들이대며 얼쩡거릴 것이 아니라 과객처럼 조용히 지나가줘야 했다. 그들이 허기를 채우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그럼에도 또다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마침 잣나무 둥치 너머로 콩콩 뛰며 머리를 숙이는 박새를 찰칵, 포착했다.
그러나 앨범을 확인해 본 뒤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내가 간신히 붙잡은 박새의 영상은 주변에 쌓인 낙엽들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 더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녀석들과의 밀고 당기기를 이제 그만 멈춰야 했다. 쓰고 보니 우습다. 도대체 새들이 나한테 뭘 어쨌다고 밀고 당기기란 말인가. 나 홀로 부르고 쓰고 다 해놓고…….
인간을 제외한 뭇 생명체들은 삶의 방식이 프로그래밍된 채 태어난다. 오직 인간만이 그 쓸모와 본질이 결정되지 않은 채 세상에 내던져지듯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의 매순간, 매일의 삶은 선택의 연속, 즉 도전이라고 할밖에 없다. 모든 생명체들 가운데 인간만이 도전을 한다. 그러니 도전은 나 자신을 나타내면서 모든 인간을 정의하는 단어이기도 한 것이다.
박새를 찍으려던 나의 행위도 일종의 도전이었다. 놓아두면 절로 달아나고, 흘러가버리는 속절없는 순간을 애써 붙잡아 간직하고자 하는 열망이 부추긴 도전. 그러니 이 도전은 누굴 향한 것일까. 박새? 시간?
상대와 맞서 싸운다는 의미의 이 단어에서 상대는 엄밀히 따지면 바로 나 자신이다. 혹은 어제의, 지나간 나 자신이다. 도전하는 자라면 이전의 모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의 나도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가버리고 있다. 나는 박새보다도 더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붙잡으려 하면 달아나는 새들처럼 금세 종적을 감추고 없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오늘 아침도 나는 어제의 나를 찢고 나왔다. 매일의 오늘이 새로 오는 오늘인 것처럼 오늘의 나도 새롭게 거듭나는 나인 것이다.
이렇듯 나의 매일은 도전으로 채워진다.
도전을 하는 존재이기에 삶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나는 이따금 자신을 조약돌에 비유하곤 한다. 조약돌은 원래 커다란 바윗덩이였지만 달의 인력에 의해 들고 나는 물결에, 철썩이는 파도에, 그리고 가없는 세월에 닳아지고 쓸리고 깨지며 지금의 조약돌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하나의 이야기다. 거칠고 모나고 강퍅한 바윗덩이가 시간에 쓸려간 이야기. 조약돌은 겉보기엔 하나의 왜소한 파편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거대한 바윗덩이보다 많은, 그리고 풍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도, 그 중의 하나인 나도 마찬가지다. 이 보잘 것 없는 육신은 시간에 떠밀려 나이를 먹고 죽음으로 향해가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 삶의 이야기는 점점 울창하게 출렁인다.
그리하여 조약돌이라는 하나의 파편은 잃어버린 세계인 동시에 되찾은 시간이다.
파편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진정한 의미에서의 깨어남, 줄탁동시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나는 이제 새로운 이력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이 나로부터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