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주은 조약돌

『데미안』, 표적을 가진 사람들

by 수연


중학교 1학년 시절 처음 읽고 반한 소설 『데미안』을 다시 펼쳐 읽던 중 이전과는 달라진 관점을 발견했다. 사춘기 시절에는 ‘데미안’이라는 매혹적인 인물에 대한 동경이 이 책에 몰입하게 만들었다면,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은 뜻밖의 주제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 주제는 대학생이 된 싱클레어가 우연히 저녁의 거리를 걷다 길모퉁이에서 데미안과 재회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데미안은 첫눈에 그를 알아보고 정원 딸린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싱클레어는 이튿날 그곳에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난다. 둘은 싱클레어가 김나지움 학생일 적에 ‘꿈 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데미안에게 그려 보낸 매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은 현재 이들이 마주앉은 현관홀 벽 위에 걸려 있다. 그림 속 매는 몸의 절반이 지구 땅덩이 속에 처박힌 채 솟아 나오려고 애쓰고 있다. 이 매 그림에 대해 지난 날 데미안은 예언, 아니 화두와도 같은 답장을 보냈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데미안』 p.122, 헤르만 헤세, 민음사


싱클레어는 당시 아브락사스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다 평소 호감을 주던 젊은 보조 선생님의 입에서 그 이름을 다시 듣는다. ‘섬세하고도 열정적으로’ 이어지는 선생님의 설명 가운데 특히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다는 말이 여운을 남긴다. 아브락스는 한동안 그를 타오르게 한다. 그는 선생님의 말을 단서로 기억 속 데미안과의 대화며 도서관의 책들에서 본질적인 의미를 붙잡으려 하나 ‘손안에 든 돌 하나’에 머문 진실만을 찾아내는 데 그치고 만다. 그러나 보지 않는 순간에도 항상 밤길 걷는 행인의 뒤를 쫓는 달처럼 아브락사스는 무의식 중에 계속 싱클레어와 이어지며 내면의 영상으로 새겨진다.


대학 진학을 한 해 앞두고 방황하던 시기, 우연히 만난 교회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로부터 그 비밀스런 의미에 대해 전해 듣는다. 하지만 그 의미는 남에게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싱클레어는 깨닫는다. 아브락사스에 다가가는 길은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는 것임을. 오롯이 자신이 되어야만 그 의미가 확연해지는 이름이 아브락사스임을 말이다. 그 길은 지독히도 고독하고 외로우며 사무친다. 그리하여 싱클레어는 숱하게 뒤엉키고 헤매다 부르짖는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같은 책, p.128

그는 에바 부인과의 이야기를 통해 되살아난 절망적인 과도기를 떠올리며 이렇게 고백한다.

“(……), 전 당시에 자주 생각했어요. 죽어야겠다고요. 그 길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어렵습니까?”

-같은 책, p.188

싱클레어의 물음에 에바부인은 상냥하게 대답한다.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

-같은 책, p.188


태어난다는 것의 어려움. 나는 늘 느끼고 있다. 오늘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얼마 전 내 생의 한 시기가 저물었다. 그 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을 잠시 중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만난 글벗들과 어울려 함께 책을 썼다. 이 기간은 불교에 입문해 수계를 받고 월륜행이라는 법명으로 다시 태어난 일과 맞물려 있다. 이제 나는 정말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니, 그 첫발을 이미 내딛었다. 지금은 잠자코 기다리는 중이다. 그러나 준비되어 있는가. 이 물음을 정확히 풀자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다. 나의 선택과 세상의 필요에 따라 이제 곧 내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질 것이다. 그 역할은 이전과 얼마나 흡사하고 얼마나 다를까. 또 얼마나 새롭고 얼마나 생경한 체험이 될까.

싱클레어는 표적을 가진 자들에게 인류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라고 정의한다. 일종의 시간 여행자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자신들의 ‘의무이자 운명이라고 느끼는 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것이 가져올 어떤 것에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할 만큼 우리 누구든 그토록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기꺼이 자기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싹의 요구에 그토록 완전히 따르며 살리라는 것.

-같은 책, p.193


이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을 비롯한 모든 표적을 가진 자들에게 단 한 가지 이유에서 이미 감성적으로 자명해졌다. 바로 ‘하나의 신생과 지금의 와해가 가까웠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은 또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파국 이후의 삶을 암시하기도 한다. 데미안은 당시 유럽의 영혼이 ‘오래 묶여 있던 짐승’과도 같다고 이야기하며 ‘그의 첫 활동이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의 영혼이 이끄는 무시무시한 길은 역사적으로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이며 표적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나폴레옹과 카이사르, 그리고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옹호한 성직자 로욜라로 대표되는 이른바 ‘운명의 인간’이다. 표적을 지닌 소수의 운명적 인간들은 한마디로 ‘준비된’ 자들이다. 위험하지만 역사적인 진화의 맥락에서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인류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준비가 된 인간.


나는 이 대목을 데미안이 제시하는 거창하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읽어내진 않았다. 시대와 현실, 그리고 사유하는 방식이 달라진 때문이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감성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내가 특별히 꽂힌 단어는 ‘준비된’, 그리고 ‘운명의’, 이다. 나 자신이 변화에 직면해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변화는 나 홀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알이라기보다 하나의 조약돌이다. 이 조약돌은 시간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다. 사회의 요구와 내면에서 솟아나오는 것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인해 서로 마찰을 일으켜 깎이고 깨지며 부서져 생긴 파편. 나는 이 파편의 진짜 이름을 찾아주고 싶다. 그리하여 파편을 파편으로 남겨두지 않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다듬어나가고 싶다. 순간을 향하여 파우스트처럼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 경탄하는 삶, 나는 이 창조적인 삶 속으로 나를 찢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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