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후 秋夕

가을 눈을 응시하며

by 수연


두루마리구름이 녹아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긴긴여름이 가는 소리다. 나는 열차의 이동을 떠올린다. 열차 안에서 가만히 마주본 번뜩이는 속도를 생각한다. 차창 밖으로 두 개의 평행선을 그으며 휙휙, 흰 빛을 튀겨 스쳐 가고 오는 전동차의 속도는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시켜놓은 것 같았다. 정차와 정차 사이 내달리는 그 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노라면 내가 휘발되고 오로지 뻥 뚫린 시야만 남아 내가 타고 있던 3630호 열차간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신선한 감각이었다. 고도로 집중한 순간에만 맛볼 수 있는 평정. 이것이 매번 나를 출발하게 했고, 가만히 이동하게 했다.

구슬땀을 내며 걷는 동안엔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하지만 계절은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가장자리로 어느새 마른 잎이 구르며 바스락거렸고, 목덜미에 닿는 햇볕은 태우는 듯 뜨거웠다. 푸른 것이 붉어지게, 단단한 것은 물러지도록 하는 열기였다. 지천에 가득했던 매미 울음은 뚝 그쳤다. 그만큼 커다란 공백과 선선한 웃음이 남았다.

추석 전날 숲에서 청설모를 마주쳤다. 예기치 않은 만남이었다. 청설모는 거의 제 얼굴의 반만 한 도토리를 입에 문 채 쉬지 않고 재빨리 움직였다. 작고 날카로운 발끝으로 흙을 파내 도토리를 묻고, 기민하게 나무를 타고 오르는 동작 하나하나가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목도하는 평행선의 흐름과 맞먹는 속도로 번득였다. 나는 가방에서 시부저기 휴대폰을 꺼내들고서도 그 속도 앞에 얼어붙어 카메라를 열지 못했다. 내겐 빗장이 많았다. 휴대폰 비밀번호 일곱자리를 눌러 잠금을 해제하고 카메라 앱을 활성화시켜 찍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임무처럼 여겨졌다. 놓칠까 불안하여 손끝도 까딱할 수 없었다. 저토록 기민한 녀석이 내가 찍기까지 그대로 있을 리가 없지, 감쪽같이 달아나버리지나 않을까, 눈앞에서 놓칠 거면 그냥 찍지 말고 눈으로나 담아 가자.

모르는 사이 다가와 같이 청설모를 지켜보던 아저씨 한 분이 플래시를 터뜨리듯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낯선 아저씨의 너털웃음이 문득 부추겼지만 두 팔을 늘어뜨리고 선물같이 다가온 가을의 귀중한 한 컷을 놓치고 말았다.

덥고 김도 새서 그 길로 숲을 나서려다 뒤늦게 찾아온 미련 때문에 성큼성큼 올라갔다. 두 번째로 청설모를 발견하자마자, 놀랄 만한 속도로 거칠게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번엔 작심하고 노렸다. 단박에 휴대폰과 '놓칠까 봐'라는 불안의 빗장을 걷어낸 다음, 찍었다. 하지만 도토리를 입에 문 장면은 아니었다. 수차례 셔터를 눌러댔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거의 초점이 흐린 상태였고, 그나마 형태가 또렷한 사진은 청설모가 자신의 보호색과 같은 색 나무 둥치에 나무늘보처럼 매달린 것 두어 개 뿐이었다.

만약 불안을 떨쳐내고 카메라를 켰더라면 도토리를 문 청설모를 찍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좀 더 성의껏 대답하자면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서로 갈라진 지점으로까지 소급해올라가야 한다. 밤하늘에 뜬 달을 놓고 둘은 첨예하게 다른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확실하고 절대적인 우주의 질서를 예찬한 아인슈타인은 내가 보지 않아도 달은 떠 있다는 주장을 펼친 반면 현대 입자물리학자들의 실험에 의해 관측 행위가 대상을 교란시킨다는 것이 증명되며 오늘날 양자역학의 대부로 떠오른 닐스 보어의 경우, 내가 보지 않는 한 저 달은 없다, 라고 주장한다. 즉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확률적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단언이다.

내가 만약 관측하는 순간 존재한다는 보어의 입장을 따른다면,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관점에 힘입어 용기 내어 도전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면 지금쯤, 도토리를 문 청설모가 내 카톡 프사를 장식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불안의 소리에 귀기울였다. 야, 그건 불가능해. 하나마나 놓칠 거야! 저렇게 빠르고 민감한데 네 느린 동작으로 카메라까지 켜고 그 장면을 포착해낸다고! 에이, 몰라!, 하고 청설모와 나의 상대 속도에 충실한 결론을 내려버렸다.

덕분에 나의 프사는 아직 여름에 머물러 있다. 꼭 도토리를 문 청설모가 가을의 풍경일 필요는 없겠으나 내가 손 써보기도 전에 놓친 정경이기에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래도 엊그제 밤 모처럼 구름이 걷히고 8월 보름답게 익은 달이 떴기에 다시 의욕을 냈다. 가을 저녁이라도 제대로 담자 싶어 베란다 방충망까지 열고 최대한 또렷하게 각도를 맞춰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다만, 줌 기능을 사용하면 화질이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밭처럼 깨지는 카메라여서 라이브 버전으로 놓고 찍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하여 보름달은 거대한 밤의 아주 작은 눈동자같이 찍혔다.

잠시 이 반짝이는 가을 눈을 마주본다. 그간 소소하게 눈앞, 코끝, 귓가로 다가온 가을을 마주치고 놓치길 되풀이하며 한창 가을 열차에 실려 가고 있었구나 싶다. 지금도 가만히 앉아 타닥타닥 응시하는 이 몸을 싣고 열차가 이동한다. 빗소리는 그치고 어스름이 듣는데, 이 순간 곰곰 기억을 새기던 나는 종적이 묘연하다. 녹아내린 구름처럼 흘러가고 새로운 내가 소리도 없이 와 들앉아 있다. 달은, 그러니까 늘 여기 비춘다. 뻥 뚫린 시야로 순간순간 새로 오는 나와 함께하는 달.

보름이 지나도 매일 저녁 秋夕이 새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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